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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이크만
김원방
반이정
이진명
이용백 작가론 :
혼합 미학의
미래를 지향하다.
반이정 | 미술평론가
미디어아트의 경전이 되다시피 한 <뉴미디어의 언어(The language of new media)> 초판을 내며 저자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가 2003년 쓴 서문에는 “다양한 조합을 통해, 과거의 것과 새로운 것을 창조적으로 병치하려는 욕구”를 작금의 문화에서 목격되는 하나의 국제적 경향이라 파악한다. 또 자신의 연구 초점은 이러한 혼합성 미학이 형성해놓은 새로운 문화 형식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거라 피력한다. 그는 뉴미디어를 “짧게 말해, 문화와 컴퓨터의 재혼합”이라고 규정한다. 40대 중반 아티스트 이용백이 2007년 제작한 <New Folder- Drag>는 400kg 중량의 폴더 모양의 인조 대리석(뒤퐁)으로 만든 육중한 부피의 입체 조형물이다. 이 노란색 폴더를 원시 인류가 이동 수단으로 고안한 바퀴의 원조 격인 일렬로 늘어놓은 원통형 통나무 더미 위로 올려놓았다. 이는 실제 모니터 상에선 중량 제로(빈 폴더의 무게는 0 바이트이니까)인 가상 폴더를 현실의 시공간 안으로 무모하고도 황당한 제스처로 끌어온(drag) 것이다. 문명화 이전 유물인 원통 나무 바퀴 위에 얹힌 고도정보사회 아이콘의 허황된 자태는 물리적으로 결코 만날 수 없이 동떨어진 두 문화를 인위적으로 충돌시킨 은유일 것이다. 작가가 유도한 과거와 현재 사이의 병치를 어떻게 읽어야할까. 동일한 주제를 상이한 매체로 재가공한 이용백의 제작기법에 답하듯 <New Folder Drag> 설치에 답하는 동영상 작품도 있다. 중국에서 직접 촬영한 영상 기록물로 거대한 폴더 모형을 일군의 인간이 모여 수평 이동하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이다. 가상공간에서 손쉬운 드래그(drag)만으로 엄청난 정보가 담긴 폴더를 움직일 수 있음에도, 영상은 구시대적 노동력인 노새와 중국 현지 아이들을 육중한 부피의 폴더를 견인하게 만든 것이다. 이 황당한 상황 설정은 말 그대로 “문화와 컴퓨터가 재혼합” 된 양상을 드러내려는 것일 게다. 쓸모없이 허황되게 부풀린 폴더와 중국인의 인력이 결합된 화면을 통해, 제3세계 노동 시장의 실상을 엿보는 느낌도 든다. 즉 중국 대륙이 직면한 문화 지체 현상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편 <New Folder Drag>속에 등장하는 노새는 그가 야심차게 내놨던, 초기작 <Artificial Emotion>(2000)을 연상시킨다. 박제된 죽은 황소의 몸에 다섯 개의 인공호흡 장치를 붙여 그것을 매개삼아 관객과 황소 사이의 상호 작용을 유도한(사람이 호흡기에 대고 숨 쉬면 죽은 소가 이에 반응해 마치 숨 쉬듯 호흡하는 설치물) 작품이다. 또 그것은 다시금 전시장 천장에 말을 매단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The Ballad of Trotsky>(1996)나, 데미안 허스트가 1990년 이후 연이어 내놓은 유리관에 담긴 죽은 포유류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카텔란과 허스트의 작품들이 국제 화단과 여론(동물보호단체의 항의)에 파장을 던진 것과는 달리, 2000년 이용백의 <Artificial Emotion>은 국내 화단에서 큰 반응을 얻진 못한 것 같다. 대신 이용백이 향후 풀어가야 할 작업 논리의 실마리를 던져줬다. 임시 탁자를 경계 삼아, 그 위로 농경사회의 전유물인 황소가 ‘죽은 채’ ‘가짜’ 반응을 한다. 반면 그 아래로 그 당시 최신형 IBM 컴퓨터 본체가 가동 중이었다. 요약하면 2000년 그 작품은 죽은 황소와 살아있는 컴퓨터를 대비시킨 구조이다. 이것이 첫 번째 수직적 경계이고 드러누운 황소와 황소에게 숨을 불어넣는 인간 관객 사이에 두 번째 수평적 경계가 형성된다. 이처럼 일견 정반대 속성의 대상 사이를 인터페이스로 엮어간 그의 초기작은 이후 작업들에서 반복된다. 물론 이는 이용백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유효한 주제어일 것이다.
이용백의 작업 연보에는 하나의 몸통을 상반된 성질의 둘로 나눠 대비시키고 긴장을 유발하는 작품군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것은 기능 및 의미론으로 볼 때 거울에 빗댈 만하다. 미술비평가 김원방은 “가상과 실재 간의 이분법적 대립의 와해”라는 말로 이용백을 해설한 바 있다. 이는 거울 효과의 한 면모를 설명한 것일 게다. 이용백 작업 속에 드러나는 거울 효과는 관객에게 동일한 대상/현상의 양면성을 성찰하도록 유도하는데, 그 단서로 매우 친숙한 도상을 미끼로 던진다. 세계 양대 종교 지도자의 도상이 담긴 <Inbetween Buddha and Jesus Christ>(2002), 미술사의 유서깊은 종교 도상을 쓴 <Pieta>(2007)(동일한 제목의 작품이 2008년 초대형 입체 조형물로 재 제작됨), 그리스 신화 나르시스의 이야기를 가져온 <Narcissus>(2008)등이 그렇다. 이용백의 거울 작품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 ‘요상한’ 거울이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초상을 그려 좌우가 뒤바뀐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인쇄물을 디지털프린팅 기법으로 도로 뒤집어서, 결국 진실(빈센트 반 고흐의 잘린 귀는 왼쪽!)을 확인시킨 <Re Re Reflection>(1999)같은 초기작은 거울 효과를 가장 직설적으로 이용한 경우일 테고, 아예 거울을 작업 소재로 도입한 <Mirror>(2007-2008)는 반투명유리(two way mirror)를 42인치 LCD스크린에 붙여, 마치 실제 거울에 균열이 생기는 것 같은 착시를 유도한 본격적 거울 설치 작업이다. 한데 이 작업의 시원은 이미 1994년 시도 되었고, 발전과 변모를 거듭해 오늘의 거울 작품에 이른 것이다. <Mirror>의 진가는 거울 반사면과 그것이 투영된 실제 대상 사이에 미묘한 균열을 일으키면서 발휘된다. 스피커가 쏟아내는 굉음과 함께 모니터 위로 세 개의 정교한 탄환 구멍이 뚫리는데(이는 쇠구슬 BB탄이 유리를 실제 관통하는 장면을 초당 5만 프레임의 고속 촬영으로 녹화한 것이다), 금이 간 거울과는 달리 거울 밖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인체에는 아무런 상해가 생기지 않는다. 거울을 바라보는 이는 ‘멀쩡한 채로 깨진’ 거울 반사면 위에 비친 자신의 균열된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균열된 모양의 거울 스크린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체험이다. 이는 마야 린(Maya Lin)의 1981년 공모 당선작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의 효과를 연상시킨다. 검은 화강암으로 제작된 기념비 위로 전사자들의 성함이 빼곡하게 기재되었는데 그 앞에 선 참배객은 전사자의 이름이 음각된 ‘거울처럼 반사되는’ 화강암 위로 자신의 모습이 중첩되는 걸 지켜봐야 한다. 마야 린 작품의 비장미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온다. 묘석 밖에 선 사람은 비록 멀쩡하지만 전사자의 이름으로 얼룩진 묘석 위로 생존자인 자신의 상이 반사되도록 만들었다. 이용백의 거울작업도 그가 독일 유학시절 친구 실종 사건을 겪은 후, 자신에게 발생한 비현실적 공간 구성에 대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다. 흔히 거울을 둘러싼 전설이나 미신 가운데에 거울을 영혼의 반사로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 이 재치 있는 구전(口傳)은 마야 린의 기념비나 이용백의 거울의 미학적 기능성을 이해하는데 도움 될 만하다.
<Pieta>(2008)와 <Narcissus>(2008)도 거울을 동원하지 않고 거울효과의 재미를 본 작업이라 할 만하다. 두 작업 모두 전통적으로 선호된 도상인 죽은 예수를 애도하는 마리아와 나르시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둘로 나뉜 인체상(마리아 vs 예수, 나르시스 vs 물에 비친 나르시스)이 실은 단 하나의 거푸집과 그 안에서 나온 FRP주물을 단지 둘로 쪼개놓은 것이니까. 즉 하나의 몸체가 상이한 둘로 나뉜 것이다. 널리 알려진 나르시스는 신화가 말하듯 수면에 비친 자신의 외모에 미혹된 자아도취적 캐릭터의 불행을 다룬 것이다. 생명력 없는 거푸집으로 만든 마리아에 비해, 분홍빛 번들거리는 예수의 피부는 구체관절 인형의 육감미를 빼닮아 마리아의 중립적 피부와 대립한다. 전통적 피에타로부터 체위만 빌려온 이용백의 <Pieta>는 애도하는 마리아에게서 모성애가 느껴지거나 사망한 아들 예수에게서 비애감이 묻어나지 않고, 마네킹처럼 무감동해 보인다. 현대 문명에서 종교적 도상의 본질을 큰 사이즈로 구체화한 모습이 그가 해석한 피에타다.
<Angel Soldier>(2005)는 반등의 입지를 굳혀준 2000년대 중반부 대표작이다. <Angel Soldier>의 위용은 그것이 사진, 행위예술, 오브제, 동영상이라는 네 개의 상이한 채널로 가공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각기 개별적 작업으로 취급될 수도, 통합될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또 <Angel Soldier>에 우격다짐으로 거울효과를 적용하는 건 무리지만, 적어도 상충되는 요소를 결합시킨 점, 남한 사회의 동시대성을 담은 점은 크게 봐서 이용백의 거울 미학을 따르는 것이다. 슬로우 모션에 버금가는 저속으로 수색 중인 전투복 차림 인물이 나오는 <Angel Soldier>는 현대 직장인의 유니폼이라 할 만한 정장을 입은 남성이 수심 깊은 곳에서 느리게 전진하는 <Vaporized things(Post IMF)>(2002)의 후속작으로 이해될 법하다. 개인화기 대신 ‘꽃총’을, 군부대 마크 대신 컴퓨터 폴더를, 군대 병과(a branch of the (military) service) 기호 대신 컴퓨터 프로그램 아이콘을 채택한 점은 미디어 문화를 작업에 꾸준히 반영했던 이용백의 계통도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한편 눈부실 만큼 요란한 꽃무늬 위장복은 회화 <Plastic Fish>(2008)를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끼로 월척을 낚아 올리는 낚시의 원리처럼, 현란한 위장복으로 적을 교란하는 특징은 서로 닮아있다. 분단 체제의 남한 사회에서 <Angel Soldier>는 블랙 코미디의 요소도 갖는다. 한편 꽃무늬 전투복 위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예술인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들의 지위를 군대 계급장으로 처리한 사실은 예술계의 권력지도를 은유한 것이다. 이용백의 인상은 조각가의 피를 물려받은 양 작고 다부진 체구, 검게 탄 둥근 얼굴과 가는 눈매를 지녔다. 그가 현재 작업실로 쓰는 공간은 마치 공장처럼 보인다. 그 안에 공구와 화구, 카메라 장비, 대형 스피커, 신형 LCD 모니터 여러 대가 뒤섞여있었다. 작업실 벽면에는 그가 바다낚시에서 건진 월척의 탁본도 걸려있다. 마치 공장을 닮아있는 작업 공간 속에서 이용백이 건져 올린 작품의 연보는 물고기의 수만큼이나 다채롭다. 어쩌면 그것은 현대 미술이 뉴미디어와 결합한 미래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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