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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이크만
김원방
반이정
이진명
이용백의 작업:
디지털 시뮬레이션 시대의
철학적 거울
김원방 | 미술평론가
베니스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소위 정기적 국제전들의 중요한 존재이유 중의 하나는 ‘의미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국제현대미술의 광범위한 흐름을 하나의 시공간에 배열하고 지형화하여 현대미술에 대한 ‘통합적 전망과 지식’, 그리고 그 흐름에 내재한 ‘역사주의적 의미’까지도 생생히 체감토록 함으로써, 혼돈으로부터 형태과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예술의 생산과정에 본래적으로 내재한 예측불가능성과 역능성(力能性)을 우리의 시각적 욕망에 예속시키고, 나아가 이해가능한 온갖 미술사 이론의 상징질서 속으로 편입시키는 괴물 같은 ‘전지구적 지식기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초대형 국제전은, 예술작품에 대하여 이를 해설하는 언어와 관리시스템의 우위를, 그리고 생성과 돌연변이에 대해 ‘예술계’(Artworld)라는 닫혀진 ‘계’(界)의 개념의 우위를 공고히 하는 장치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 시스템이란 것은 전시 전체를 조망하고 이것을 언어적 통사로 거시적으로 재구성할 때 생기는 하나의 ‘사후적인’(après-coup) 환영 같은 것이고,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개개의 작품은 그 어떤 전체적 흐름이나 진행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빗겨져 나가는 우발적 입자 같은 것이다. 작품은 예술의 보이지 않던 가상적 차원이 우발적으로 형상화되는 짧은 순간 같은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독창적이라고 공인된 현대미술’이 아니라 ‘독창성의 정의로부터 벗어난 현대미술’이 진정 독창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진정 창의적인 예술가들은 소위 ‘국제미술계’의 주류 속에 자신의 예술을 편입시키고 예술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무익한 발상인가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제 54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서 이용백은 바로 그러한 ‘특이함의 순간’과 같은 작가라고 생각된다. 한국처럼 아직은 세계미술 흐름의 주변부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국제미술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쓰는 전략들, 예를 들면 ‘서구의 주류적 흐름에 편승하기’- 예를 들면 90년대 이후 성행한 속칭 “관계적 예술”(Relational Art), 그리고 후기식민주의적 보고서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다큐멘터리 예술 같은 흐름들- 또는 불교나 동양화, 민속문화에서 빌어온 아시아적 소재들을 이국풍물적 구경꺼리로 차용하여 서구인들의 호기심을 끌려는 상투적 전략 등으로부터 이용백은 일체 거리를 두면서 지난 20여년 간 자신의 작업의 내적인 발전을 부단하게 도모해 왔다. 그리고 이번 한국관의 전시작 구성에서도 작가의 그러한 의식이 나타나 있다. 이용백은 비엔날레의 현장 분위기를 의식한 새로운 작품이나, 시선을 끌기 좋은 초대형 설치 같은 것을 지양하고, 대신 자기 작업의 현재진행적 모습을 액면 그대로 노출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용백은 싱글채널 비디오에서부터 상호작용예술(interactive art), 음향설치, 나아가 공감각적(共感覺的) 작업 과 로보틱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테크놀로지 예술을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실험해 온 작가로서, 지난 10년간 특히 유럽과 중국에서의 활발한 전시활동을 통해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90년도 초반 이후 현재까지의 이용백의 작품들은 그 시각적 소재와 하드웨어에 있어 상당히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그의 작업은 디지털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쟁점들, 예를 들면 ‘가상현실시대에 인간의 탈-중심화된 주체성’, ‘디지털 시뮬라크르가 수반하는 인식론적 변화’, ‘아날로그 언어의 종말과 문화적 이교주의(異敎主義, paganism)의 도래’ 등의 문제들을 폭 넓게 탐구해 왔다. 이번 한국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사용된 매체는 다양하지만 그것들이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는 밀접히 상호 연관된 몇 개의 연작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비디오 작업인 <Angel-Soldier>, 낚시용 미끼들을 그린 회화인 <Plastic Fish>, 조각인 <Pieta>, 그리고 거울과 영상을 결합한 <Mirror> 등, 네 개의 연작들이다. 그럼 이제부터 각각의 연작들의 특징들에 대해 논해보도록 하자.
2005년부터 계속되오고 있는 작품 <Angel-Soldier>(천사-군인) 연작은 비디오, 사진, 오브제 설치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전시되는 작품으로서, 조화(造花)들로 가득 채워진 풍경의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주의깊게 바라보면 놀랍게도 그 안에서 조화로 몸 전체를 위장하고 총을 든 채 은밀히 전진하는 한 명의 군인이 발견된다. 꽃의 모조물, 즉 일종의 시뮬라크르로 구성된 풍경과 전사의 이미지를 결합시킴으로써, 이 작품은 오늘날 새로운 자연을 구성하는 디지털화된 사회와 사이버 공간의 풍경을 실재로부터 분리되어 버린 가상세계 속에서의 음산한 전쟁과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 또한 그것은 또한 아서 크로커(Arthur Kroker)가 ‘액체적 자아’라고 표현한 것, 말하자면 사이버 공간 속에 흡수되어 용해되고, 아바타적 기호로 변형되고, 네트워크 속에서 산종, 소멸되는 우리의 새로운 디지털 존재론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에 진입하여 휴머니즘적이고 근대적인 자아, 달리 말해 견고한 데카르트적 자아가 와해되리라는 불안, 그리고 역설적으로는 오히려 그러한 시대에 뒤떨어진 자아를 기꺼이 소멸시키려는 ‘죽음충동’과 쾌락의 공간으로서 사이버 공간을 묘사한다.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한 세계에서의 이러한 죽음충동의 문제는 이용백의 다른 작업들을 통해서도 선명히 드러나는 중요한 면이다. 예를 들어 <Plastic Fish> 연작은 낚시용 플라스틱 ‘루어’(인조 미끼)의 이미지를 클로즈-업하고 극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그것이 지닌 시뮬라크르로서의 느낌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있다. 그 루어들의 반짝거리는 플라스틱 외피와 극사실적 묘사는 과도한 시각적 자극을 통해 우리를 일종의 몰입(immersion)에 가까운 상황으로 유도하는데, 이것이 곧 ‘시뮬라크르가 지니는 치명적 유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하이퍼리얼리티’로서 외부의 대상과 주체의 내부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 달리 말하면 그려진 루어들과 이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눈 사이에 ‘환유적 일치’가 발생하는 상황이다. 그것은 자끄 라깡(Jacque Lacan)이 그의 시각이론에서 예로 들었던 바, “바다 위에 떠다니며 햇빛에 반짝이는 정어리 통조림 깡통”과 같은 것이다. 통조림 깡통의 반짝이는 빛에 몰입하는 순간 그것은 ‘아무런 대상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지나친 봄’은 시선의 방향을 대상으로부터 주체를 향하도록 역전시키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눈 멈’(盲目)과 죽음충동의 영역이다.
<Pieta> 연작은 회화의 고전적 소재인 ‘피에타’에서의 성모와 예수의 관계를, 조각의 캐스팅 작업을 구성하는 두가지 요소, 즉 주형(mold)과 이 주형을 통해 생산된 포지지브 주물 간의 관계로 바꿔 패러디 한 작품이다. 이용백의 <Pieta>에서는 성모와 예수가 일종의 사이보그나 로보트들로 대체되어 있다. 이 작품은, 마치 이제 디지털 시대에는 근대 인본주의적 의미의 인간과 신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진화론과 생물학으로부터 벗어난 온갖 불경스러운 혼성적 사이보그나 로보트, 그리고 생명공학적 괴물들이 차지하리라는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통찰을 환기시키는 듯하다. 여기서 조각의 포지티브와 네가티브가 패러디하는 ‘생산자/생산된 자’의 관계, 또는 ‘창조자/피조물’ 간의 관계는 생물학적인 성차의 특성이 제거된 채 일종의 무성생식(無性生殖) 또는 ‘독신자적’ 자기생성의 과정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연작은 정신분석학의 전통적 기초가 되어 온 ‘어머니-아버지-나’라는 삼자관계를 넘어서서, 앞으로 디지털기술과 생명공학, 사이보그 시대를 점령할 反-오이디푸스적 생산방식과 탈젠더화된 주체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독신자적 자기복제 과정은 디지털 시대에 있어서 ‘절대적 차이’의 종말을 의미한다. 실재하는 원본이 없는 디지털 시뮬라크르들은 서로 융합되고 변형되어 나갈 수 있는 외양(外樣)에 불과하며, 전체적으로는 사실상 하나로 통합될 수 밖에 없는, 또는 이미 통합된 ‘동질적 차원’을 구성한다. 모든 것은 쟝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면, 자신들의 작동회로 내부에서 “내파”(implosion)한다. 그 어떤 기호도 결코 다른 기호에 대해 대립 할 수 없다. 모든 차이는 외부의 타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내부를 향하는 재귀적(reflexive)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예를 들어 <Pieta>에서 네가티브 몰드와 포지티브 조각은 형태적으로는 잠시나마 대립과 차이를 드러내는 듯 하지만, 복제과정 그 자체는 상호 간의 통합적이고 상호교차배어법적인 관계로부터 가능해진다. 따라서 이로부터 도출된 포지티브와 네가티브 간의 관계는 서로 간에 대립과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오이디푸스적 관계가 아니라, 모든 절대적 차이가 중화된 ‘비-차이’의 차원, 정해진 원본이 원래부터 없는 ‘잠재적 가능성의 집합’ 속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뮬라크르의 세계는 겉으로는 격동적 차이와 대립에 가득차 있는 듯 하지만, 그 의미론적 토대는 ‘전적인 무의미’ 즉 죽음의 세계인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본래부터 불가능했던 존재’가 사산(死産)된 찌거기에 불과하다. 그것은 언어도, 진실도, 심지어 이미지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원본을 추정할 수 없는, 원본이 본래 부재한 무(無)의 외양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을 허구적으로 급조하기 위해, 존재의 결핍과 사산으로 끝난 잉태를 감추기 위해 반복적이고 과잉된 생산을 수행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렇기 때문에 시뮬라크르는 차분한 절제보다는, 화면을 가득 채운 플라스틱 미끼나 <Pieta>에서의 독신자적 복제에서처럼 그 양과 질에 있어서 항상 지나칠 정도로 과잉된 외양을 드러낸다.
<Mirror> 연작은 소위 ‘실제공간과 가상공간 간의 경계의 와해’를 탐구하는 작품들이다. 이 연작은 커다란 거울 뒤에 모니터를 배치하고 이 화면을 통해 거울이 깨지거나 커다란 물방울이 맺혀 흐르는 영상을 보여주는 구조로 되어있다. 여기서 관객은 마치 거울 그 자체가 깨지거나 거울 위에 실제 물방울이 있는 듯한 환영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모니터나 프로젝터를 통해 보는 화면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거울이라는 실제 오브제가 지닌 ‘물질적 느낌’과 가상적 영상을 완전히 하나로 융합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공간과 가상공간 사이, 혹은 의식과 꿈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멈추어 있는 듯한 느낌을 효과적으로 연출한다. 그 거울들은 엄밀히 말해 ‘깨지는 거울’이 아니라, 깨짐이 상상적으로 발생하는 ‘환상의 공간’이다. 이유없이 반복되는 깨짐의 환상은 마치 신경증의 강박반복과 같은 불안감을 수반한다. 이용백의 작업은 바로 이와 같이 가상공간과 시뮬라크르들에 매혹되어 몰입하기 위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역으로 그 치명적 측면들을 드러내 보여주는 철학적 거울과 같은 것이다.
이용백은 이번 한국관에 전시한 작품 이외에도, 과거에 한 대부분의 작업들에서 그러한 디지털 시대의 문화적 특성에 대한 폭넓은 접근을 해 왔다. 예를 들어 <Artificiality Emotion>(1999-2000)은 죽은 소와 카메라, 기계장치를 결합하여 관객의 호흡과 몸의 움직임을 소의 호흡과 눈의 움직임에 연동시키는 공감각적인(synesthesia) 작업이었다. 또 <Tactile documentary>(1999)은 레일 위를 규칙적으로 왕복하는 LCD스크린을 통해 실제 동성애자 남성의 나체를 마치 스캐닝 하듯이 보여주는 작업으로서, 사회의 상징질서로부터 금지된 대상에 대한 응시를 드러내려 했다. 그리고 <Abnormal>(2002)에서는 부처와 예수의 얼굴 등 이질적인 종교적 도상들(icons)을 몰핑 기법으로 상호합성하는 과정을 통해 불경스런 ‘이교도주의’(paganism)나 위반의 사상을 표현하는가 하면, <Twins in Monitor>(2001)에서는 ‘가상공간에서의 주체의 탈-중심화’를 탐구한 바 있다.
약 20년간 이용백은 다양한 테크놀로지들을 작품제작의 매체로서 뿐만 아니라, 작업의 주제로서(예를 들면 “테크놀로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제기) 다루어 왔다. 그는 백남준이 그랬듯이, 테크놀로지를 예술의 매체와 형식적 조건으로 취급하되, 이와 동시에 테크놀로지 자체가 지닌 전복적 측면를 탐구해 왔으며, 단지 기술적 성능 자체의 무의미한 과시로 끝나는 많은 테크놀로지 예술들에 대해 비평적 거리를 견지해 왔다. 그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물신주의와 낙관주의를 경계하면서 그것이 인류의 삶 속에 몰고 오는 새로운 후기인간적 진화에 대해 증언하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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