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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이크만
김원방
반이정
이진명
미적 가능성들:
이용백의 천사들
존 라이크만 | 컬럼비아 대학교
미학적 범주로서의 가능한 것: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면 나는 질식할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1993)
오늘날의 예술가에게 무엇이 가능하고- 미적 의미에서 가능한, 필수적인, 약간은 신선한- 무엇이 불가능한가? 모더니즘 미술의 위대한 옛이야기의 파편들이 유례없는 스케일로 글로벌하게 생산되어 떠도는 지금, 관객으로서의 예술가에게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2011년 한국관을 채우고 있는 위장된 천사, 깨진 거울, 분투하는 피에타 로봇은 마치 현대미술의 새로운 환경- 관객과 기능-에 대한 정교한 알레고리와 같이 이러한 질문에 대해 진술한다. 베이징 전시때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베니스에 도착한 이 하이테크 형상과 공간들은 이용백이 홍익대학교에서 회화와 조각을 공부하던 1987년, 시위와 최루가스가 가득하던 서울에서 그 여정을 시작하였다. 후에 이 인물상들의 창작을 가능케 한 핵심적인 질문들을 작가가 확립한 것도, 첫 작품을 전시한 것도,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활동하는데 중점을 두고 일찍이 첫 번째 그룹을 만든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런 혼돈스런 정치, 사회적 환경 속에서 1990년대 비로소 한국의 현대미술이 시작됐다고 믿는다.’ [1]
5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20일간 시위를 벌였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이후 한국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국내 정치에 환멸을 느낀 학생들이 미국, 일본, 한국의 대중문화로 시선을 돌리게 하였으며, 새로운 비공식 예술공간의 확산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적, 세대적 분열을 초래하였다. 당시 이용백의 스승들은 모두 한국전쟁 이후 일본을 통해 등장한 한국의 모노크롬(단색화) 운동에 얽매인 미니멀리스트들이었다. 이용백이 ‘군부독재 사회’라고 부르는 이 시기는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와 형제들을 잃었던 시기이며, 본능적인 공포가 팽배한 시절이었다. 한국의 미니멀리스트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며 정치적 이슈를 회피하고 예술적 실험을 지양했다. 이와 반대로, 시위 중에 사용되는 벽화를 그리고 현수막과 전단을 만들며 ‘민중을 위한 예술’을 제창한 민중미술운동도 있었다. 이 둘 사이의 분열은 젊은 이용백에게 잘 수긍되지 않았다. 그는 이 두 그룹의 분열이야말로 남북 모두에게 치명적인 대량학살로 이어질 수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냉전시대의 더 큰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용백에게는 미니멀리스트의 형식주의적 미학과 민중미술의 민족주의적 정치성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민주주의에서 침식된 조건과 그와 동반하는 미학적, 교육적 혼수상태를 감추는 거짓의 이분법처럼 보여졌을 뿐이다. 이용백의 기이한 창조물들과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향한 탐구는 이렇게 강렬한 의식과 당시 상황에 대한 진단으로 시작되었다. 미학과 정치에 대해 어떻게 재고하고 재창조할 것인가? 예술가가 자신을 ‘천사’이자 동시에 ‘군인’으로 싸우도록 명명한 위대한 이데올로기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나 한계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한때 예술가들을 움직였던 치명적 이분법의 양 극단을 벗어나 그 사이의 중립적 공간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이 새롭고 중립적인, 거의 중성적인(neutered) 상황에서 [2] 예술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따라가거나 경계를 넘는 대신, 예술가들이 어떻게 그 경계 자체를 받아들이고 둘 중 어느 것에도 억압되지 않은 새롭고 필수적인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을까? 이용백은 이와 같은 질문들을 포스트민중미술과 포스트단색화 분위기에 빠진 ‘정치, 사회, 교육적 혼수상태’의 1990년대 한국 미술계에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섰고, 많은 경우를 해외에서, 특히 장학금으로 유학했던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의 새로운 유럽에서 찾았다. 그 곳에서 새로운 미디어를 이용한 예술과 실험을 목격하였고, 백남준과 한스 하케(Hans Haacke)와 조우하며 점진적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표현 어휘를 확립해갔다. 1996년 이용백은 신도시개발과 인구이동, 대중문화와 신자유주의 경제의 금융위기로 특징지을 수 있는 ‘새로운 아시아’ 속의 서울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미술이 산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그 만의 고유한 미학적 세계와 그 안의 독특한 형상들(물에 잠긴 회사원, 생명을 잃은 소, 오래된 서울 거리의 불협화음,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진 듯한 대중 뉴미디어의 동식물군 등)이 태어나게 된다. 서울에 정착한 작가는 이러한 새로운 형상들을 가지고 ‘글로벌’한 예술가로서의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90년대에 형성된 현대적 조건에서 작업하는 이 한국 작가에게 무엇이 가능했을까?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지냈던 이용백의 여정은 그 당시 일어난 현대예술실천(contemporary art practices)의 더 큰 변화와 일치한다. 여러 의미에서 1989년은 전환점이 된다. 우리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새로운 독일(나아가 새로운 유럽)이라는 맥락에서 한스 하케가 ‘민중(Volk, 나아가 민(民))’의 개념에 문제를 제기하는 놀라운 방식을 보았으며, 예술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더 큰 화두와 ‘초국적화(trans-nationality)의 가능성을 보았으며, 예술가들이 이를 통해 민주주의 자체를 재고하고 재창조하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우리는 백남준의 도움으로 새로이 선보인 한국의 기관들(1995년 광주비엔날레 개막과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립)과 함께 유럽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기 시작한 아시아 작가들의 새로운 역할 변화를 보았으며, 이는 이용백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게 된다. 유년시절의 형식주의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대립을 넘어선 예술적 가능성의 새로운 바람을 향한 이용백의 탐색은 이러한 더 넓은 시점에서의 글로벌한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작가의 한국적
‘모더니즘’에서 새로운 현대미술로의 전환은 넓은 의미에서 ‘세계(world)’ 미술사에서 ‘글로벌’한 미술사로의 전환이며, 이는 오랫동안 얽매였던 고정된 논리와 주장으로부터의 해방을 일컫는 것이다.
아직도 미니멀리스트 미술이 먹이나 붓을 이용하는 아시아의 전통화를 만났을 때의 단색화를 절정으로 숭배하며, 그 위대한 ‘본질(crux)’을 꿰뚫으며 내적 모더니즘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을 추구하다 말년에 위대한 로샤 현상화(Rorschach painting)로 돌아온 앤디워홀(Andy Warhol)은 서도호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잉크의 또 다른 역할을 제시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인정받기 시작한 서도호 (Do Ho Suh)의 작업은 미니멀리스트들이 글로벌 환경에서 발견한 새로운 형태의 새로운 역사속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3] 같은 시기, 중국 본토에서는 새로운 현대미술이 일어났다. 이는 한국의 모노크롬이 전후 일본의 성격을 따른 맥락과는 다른 역법과 방식을 따르며 동아시아 묵화의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76년에야 그 형태를 갖춘 ‘중국 현대미술’에 있어 1949년은 중요한 해이며(전후 일본의 ‘트라우마’로 추정할 수 있는 1945년이 아님), 1989년 민주화 운동으로 정점에 이른다. 중국 현대미술은 절제된 아시아의 미니멀리즘 [4] 과 달리 현대예술의 언어, 규모, 야망, 감각이나 센세이션에 따라 독자적인 길을 나아갔다. 서울에서 이용백만이 느낀 딜레마는 이러한 글로벌 미술계의 더 큰 지각변동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개념자체는 더 이상 한국 모노크롬 작가들의 자기 부정이나, 이에 맞선 민중미술 작가들의 민족주의적 자기주장 모두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서 1990년대에 시작된 새로운 글로벌 상황에서의 화두는 한국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골치 아픈 문제라기 보다는 한국 미술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가 어떤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만들어낼지에 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1989년 이후 전세계 미술계에 던져진 전반적인 질문은 작가개인의 특정한 예술적 여정을 어떻게 하면 독창적, 창의적, 활동적인 동시에 이전의 예술사조들과 뒤섞고 옛 것과 새것을 재고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90년대 초반의 거시적 배경 속에서 이용백은 독일에서 빌 비올라(Bill Viola),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의 작품을 보았고 디지털 테크놀로지, 또는 ‘뉴미디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방식을 향한 이 같은 전환은 백남준과 그의 작품과의 복잡한 만남의 일부를 형성했다. 플럭서스 운동의 초기 인물 또는 그 층위(strata)가 이용백의 상상력의 도가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뒤샹(Duchamp), 케이지(Cage), 보이스(Beuys), 백남준은 이용백의 새로운 초국가적인 천사들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 중 Broken Mirror와 Inbetween Buddha and Jesus가 이러한 형성기 때의 작품이다. Broken Mirror는 거울로 변형된 CRT 모니터로, 관람자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시끄럽게 깨지면서 전통적인 회화적 일루전이 만들어내는 깊은 공간을 붕괴시키고 관람자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가 마치 끝없는 고리처럼 다시 원형으로 되돌아온다. 미셸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를 분석한 유명한 글에 나오는 ‘전통적 유리’(왕의 자리를 나타낸다)과는 달리, 또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초기 비디오아트의 (관람자를 참여시키는) 피드백 장치에서 발견한 나르시시즘의 ‘거울단계’와 달리, 이용백의 거울-모니터는 상호적이면서 방해적인 새로운 역할을 제시한다. 뉴미디어를 사용하는 이러한 방식은 Inbetween Buddha and Jesus에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당시의 모핑(morphing) 기술이 고통 받는 그리스도와 미소 짓는 부처 사이의 중립적인 공간을 탐구하는 새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을 담은 당시 마이클 잭슨의 블랙 앤 화이트 뮤직비디오(비디오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이클 잭슨 자신이 검은 표범으로 변한다)와 대조적으로, 이용백은 연예인이나 인터뷰를 사용하는 대신 두 명의 위대한 영적, 종교적 인물의 사진 이미지를 모핑하여 원래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없게 했다. 위의 두 초기 작품들은 ‘참여하는’ 관람자와 조작이 쉬우며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 접근 가능해진 디지털 미디어라는 동시대 미술의 환경에 대한 탐구이다.
우리는 이용백과 백남준의 만남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단순히 Broken Mirror에 대한 백남준의 찬사가 이용백을 서울로 돌아가게 하는 단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남준은 여러 방식으로 영감을 주는 인물이었다. 실로 이용백이 귀국 후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여러 번 제작하고 발전시킨 Angel Soldier의 초기 직관은 훗날 서울의 6월 항쟁을 예고하는 듯한 베트남전 반전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 런던에서 샬롯 무어만이 꽃을 이용해 케이지의 음악을 첼로 대신 폭탄으로 연주했던 퍼포먼스에서 비롯되었다. [5] 그러나 만약 이 작품에서 백남준이 천사로(따라서 동시에 군인으로) 돌아온다면, 이는 그가 이용백의 작품이 들어선 새로운 디지털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의 위대한 전후 선(Zen)적인 기행이나 ‘네오다다’적 익살스러움을 오늘날의 널리 퍼진 사이버 네트워크와 대조되는 텔레비전 방송이라는 ‘새로운 성전(new cathedral)’과 ‘글로벌 마을(global village)‘로 향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로 백남준의 작품은 마치 이러한 새로운 물결 아래 잠겨있다가 새로운 아이디어와 미적 가능성이 있어야만 수면으로 나오는 거대한 고래와도 같다. 이는 전후 60년대 백남준의 텔레비전 시기를 오늘날의 예술에 대한 회고적 선언의 관점에서 본 데이비드 조슬릿의 최근 저서가 주장하는 바이다. [6] 조슬릿은 당시 예술의 체제 전복적인 가능성을 담고 있던 매체(mediums)와 매개(media)라는 두 개의 거대한 틀에서 예술의 개념 자체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대신 우리는 두 문제 모두를 예술가, 프로듀서, 그리고 때때로 시스템이나 정보 이론으로 무장한 ‘게릴라’가 거주하는 복수의 ‘이미지 생태계’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놀랍게도 이는 이용백이 묻기 시작한 질문과 일치한다. 예를 들어 Angel Soldier에서 중요한 것은 매체(mediums)가 아니라 여러 개의 다양한 미디어, 형태, 상황(사진, 퍼포먼스, 설치, 비디오...)들을 통해 탐구되는 복잡한 주제이다. 그리고 이 주제는 천사-군인들이 활동하는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렇게 인공과 자연, 가상과 실제 사이의 모든 흑백의 경계가 흐려진, 정보로 포화된 환경을 논의하기에 적합한 철학적 어휘를 제공하는 인물은 아마도 들뢰즈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이미 들뢰즈는 아졍스멍(배치 또는 집합)이 생명과 메커니즘, 동물과 인간, 한마디로 ‘개별화(individualization)‘ 그 자체와 같은 분리에 선행하는 합성적 환경의 모습을 발견했다. 생태학적 또는 윤리적 문제는 필수적인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되며, 이는 스피노자가 우리 각자가 단일의 ‘영적 자동 장치’라고 가정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이런 윤리적 문제는 들뢰즈가 클라이스트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예술가들이 (천사들처럼) 권력자들의 지각에 대항해 벌여야만 하는 일종의 전쟁을 위한 예술적, 미적 문제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쟁머신’에 대해서는 꼭두각시극에 대한 클라이스트의 훌륭한 글에 잘 요약되어 있다. 마치 정신 나간 새로운 안무 같은 인형의 기계적인 움직임은 인간의 지각이 익숙해져 있는 ‘중심적’ 움직임 너머의 필수적 가능성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용백의 천사들은 클라이스트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기계적이기 보다는 우리의 감수성 속 통제된 사이버 환경에 마주하며 디지털적 새로운 맥락에서 군사가 된다. 그리하여 작가가 금융위기 시기의 서울에 돌아왔을 때 천사들은 그의 진단에 따라 새로운 감수성으로 재탄생하며 더욱 충격적인 형상으로 나아갔다: 수조 안에서 빛나는 폭탄과 같은 호흡기에 의존하며 절망적인 발걸음을 천천히, 그리고 끈임없이 옮기는 세일즈맨들; 관람자가 인공호흡 하듯이 숨을 불어넣으면 눈을 다시 뜨는 디지털 장치가 되어 있는 소의 시체; 삶과 죽음, 가상과 실제 사이에 유예되어 있는 상태, 생존을 위해 싸워야만 하는 상태를 암시하는, 시각예술에서 소리를 해방시킨 케이지의 작업에서 비롯된 벌레가 무언가를 갉아먹는 듯한 이상한 소리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질식하지 않기 위하여, 어떤 가능성을!(some possibility, otherwise I’ll suffocate!) 플럭서스에서 기원하나 종전의 이분법에서 자유로운 천사들은 이제 이 새로운 숨막히는 상황을 마주해야만 한다. 천사들은 수조 안에서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여야만 하며 그 안에는 이전의 예술처럼 흩어지는 꽃들도 아직 함께—그러나 천사들은 꽃의 존재를 모르는 듯하다—부유한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예의 날개를 (반은 새, 반은 인간의 형태) 포기하고 군복을 입는다. 작업복 스타일의 군복 자체도 멋진 군화와 함께 뉴웨이브 부티크에 티셔츠처럼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전후 독일에서 보이스가 가졌던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라는 신조를 냉소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그리하여 천사들은 흩어지기 시작하는 위장된 꽃의 정글 속을 따라 베니스의 한국관 외부를 천천히, 살며시, 변함없이 걸을 것이다. 천사들은 군인이 되었으나 군인들은 마치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는 끝없는 군사작전 중에 있는 것처럼 길을 잃게 된다. ‘천사의’ 메시지는 이제 이 새로운 공간에서 퍼져나간다.
유럽 전쟁이라는 대재앙의 전야에 발터 벤야민도 천사에 주목했다. 날개를 펴고 새 힘으로 가득 차서 폐허를 돌아보는 듯한 파울 클레의 Angelus Novus에서 그는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고 수백만을 수용소에서 학살한 전쟁의 미적, 정치적 알레고리가 변증법적 이미지의 새로운 미학과 메시아 없는 메시아 시대, 즉 미래의 공동체, 새로운 전쟁 기계를 부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쩌면 다른 시간, 다른 전쟁의 상황, 다른 종류의 알레고리와 이미지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그래서 비엔날레가 거대한 글로벌 불사조처럼 일어난 광주에서 자행된 것과 같은 학살에서 비롯된 새로운 천사들과 마주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용백의 천사들은 더 이상 거창한 이데롤로기적, 문명적 선과 악의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십자가 군병도, 바빌로니안 루터의 타락한 천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 끝없이, 승리에 대한 의식없이, 심지어 희생자라는 의식조차 없이 나아간다. 그들은 뒤돌아보지도, 앞을 향하지도 않는다. 그저 계속 살아있을 뿐이다. 이들의 환경만이 가능성이라는 흩어진 꽃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의 화두는 구원도 승리도 아닌 호흡과 생존의 문제가 된 것이다.
[1] 이용백, LEE YONGBAEK – NEW FOLDER (아라리오 갤러리 전시 도록, 2008) 중 인터뷰 (수정된 번역)
[2] 한 인터뷰에서 이용백은 Angel Soldier의 여섯 천사, 전쟁터, 꽃이 만개한 정글을 ‘중성적 기호’라고 지칭하였다. 한국어로 중성은 영어의 ‘중성화된(neutered)’ (두 성별 사이에 위치한)이라는 단어에 더 가까우며 기독교 도상학에서 천사들이 성이 없는 존재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영어의 ‘중립(neutrality)’과 ‘중성화된(neutered)’은 모두 주어진 종이나 속 중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ne-uter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이용백의 중성적 공간은 군사적 의미의 ‘중립’ 또한 포함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성별이나 정의에서 벗어난 독창적 미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한국어의 다의성에 대해 알려주었으며, 이 글을 준비하는데 큰 도움을 준 뉴욕의 독립 큐레이터 정윤지(컬럼비아 대학 석사)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한다.
김종호, 류한승, 한국의 젊은 미술가들: 45명과의 인터뷰 (서울: 다빈치 기프트, 2006), 154.
[3] Miwon Kwon, “The Other Otherness: The Art of Do-Ho Suh,” Do-Ho Suh, ed. Lisa G. Corrin (London and Seattle: Serpentine Gallery and Seattle Art Museum, 2002), 9-25 참조.
[4] 중국 현대 미술에 대한 1차 자료를 모은 최근 저서에서 우훙(Wu Hung)은 1990년을 중요한 분기점으로 짚어낸다.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형성된 ‘실험’ 미술은 ‘현대적modern’이라고 불리며 ‘지연된 근대화’에 속한 반면, 90년대에 일어난 ‘당대 미술’은 새로운 글로벌 환경에 맞춰진 다른 종류의 예술이다. – Contemporary Chinese Art: Primary Documents (The Museum of Modern Art, 2010, p. 184 참조) New Folder - Drag (2008)에서 이용백은 그만의 사이버 상상력을 올림픽 기간 중의 베이징과 결부시키는데, 우훙의 견해에 따르면 이 기간은 2000년 상하이 비엔날레 이후 나타난 ‘전면적 상업주의, 글로벌화, 그리고 탈정치화’가 베이징을 휩쓸었던 시기였다. (400)
[5] Experimentalism Otherwise: The New York Avant-Garde and Its Limit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1), pp. 140-176에서 벤자민 피컷은 샬롯 무어만이 런던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에서 ‘조화 한 다발’로 존 케이지의 악보에 맞춰 악기를 연주한 퍼포먼스를 포함해 이용백이 영감을 받은 ‘첼로-살인’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다. 이 퍼포먼스는 다양한 종류의 ‘전쟁 소리’와 ‘폭탄 연주법’을 이용한 연작의 일부였는데, 백남준의 반나체도 이에 사용되었다. 무어만이 백남준의 신체를 ‘연주’하고 ‘범’하는 연극성에 대해 금욕주의적인 케이지가 공개적으로 불쾌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1965년 뉴욕타임즈는 저드슨 홀 공연에서 백남준이 사탕이 담긴 폭탄을 들고 무어만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을 ‘오 다다, 불쌍한 다다’라는 캡션과 함께 실었다. 그러나 피컷은 백남준이 드러낸 ‘아시아인의 상반신 나체’가 베트남전 반대 시위의 ‘꽃의 힘’과 그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또 다른 의미로 많은 것을 내포하는 상징이 되었으며, 적어도 무어만의 기억에서 이는 ‘미국 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침략하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서울의 6월 항쟁에서 꽃의 힘이 방독면을 쓴 시위 진압 경찰들에게 젊은 여성들이 연극적으로 꽂아준 꽃으로 재연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경찰 중 한 명은 후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미꽃을 받았을 때 그 가시바늘에 모든 전경의 마음이 찔리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영어 번역 정윤지; 다음 주소에서 영상을 볼 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oyuj0_mBSu0) 그리고 결국에는 군인들도 마치 민주화의 길을 닦는 학생 시위의 새로운 꽃망울에 저지당한 것처럼 실제로 작전을 멈추었다.
[6] David Joselit, Feedback: Television Against Democracy (M.I.T.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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