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라이크만
김원방
반이정
이진명






사유 존재의 구속성과
이용백의 예술

이진명 | 미술평론가

 

1. 시대적 분위기의 구속성

54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서 윤재갑 커미셔너는 이용백을 선택했다. 그가 어째서 이용백 작가를 단독으로 선정했는지에 대해서 지난 몇 달간 고심했었다. 윤재갑 커미셔너는 아시아 미술과 한국 문화의 재건을 위해 살아온 진지한 큐레이터였다는 점, 그리고 삶의 허무라는 여울이 몰아가는 낭떠러지 끝의 극한에까지 자기 몸을 그대로 맡기려는 태도로 일관했던 인물이었기에 그가 선택하고 발화했던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용백이라는 예술가와 대면해있다. 이용백은 미디어 예술과 조각, 설치, 사진, 회화 현대미술의 모든 영역을 소화하면서 감수성과 형식, 그리고 태도라는 각각의 편대를 자유자재로 지휘하여 승리로 이끄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표피적으로 이해하기에는 그렇다. 그는 아시아 작가로는 드물게 자기가 발현시킨 기제로써 글로벌한 형식성을 자랑한다. 더군다나 한국 미술 내부에서 그로 하여금 매우 추상적이게도 포스트모던 작가로 애써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러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을 거칠게 총체성, 보편타당성, 역사적 거대 담론, 인간 실존의 든든한 기반, 의심할 여지 없는 지식의 가능성 등의 가치들을 거부하는 사상적 동향 내지 운동이라고 정의할 때 이용백을 포스트모던 미술가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이용백이 정의하는 예술이란 자기 가능과 한계의 범위를 스스로 세우고 그 가능과 한계라는 벽을 향해 가장 강인한 태도와 기세로 부딪혀 외부세계에 드러내려는,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충격파이다. 여기서 자기 가능과 한계의 범위를 카를 만하임(Karl Manheim)의 표현대로 ‘사유의 존재 구속성(Seinsverbundenheit)’이라고 하자. 사유 존재의 구속성이란 생각하며 행동하는 주체는 그가 뿌리내린 토양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한계치의 영양분을 기본으로 꿈꾼 이상이 형식이 될 때 구속은 부정적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시상(時狀)이 되며 세기를 넘는 공감으로 탈바꿈된다는 진실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용백은 1967년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가까운 전시 지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군부독재, 달리 말하면 개발독재였다. 개발독재란 말 그대로 경제 개발을 기치로 국민의 자유로운 사상과 사유를 막은 강권정치였다. 이 터무니 없는 강권정치가 어떻게 한국에서 가능했는지 지금도 해석이 분분한데, 이승만 친미독재가 민중봉기로 막을 내리고 잠깐 등장했던 문민 정부의 개혁성과가 미비했고 어떠한 미래적 비전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또한, 1960년대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은 아시아의 사회주의 도미노화에 맞서 일본만은 서구화된 제도의 보루로 지키자는 것이었고 일본의 방패 역할을 한반도의 남단 한국에 맡기자는 취지였다. 그전까지 이승만은 자기 정권의 존립근거를 반일과 반공 양자에 두었다. 그런데, 한국이 일본의 방패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공산권 국가보다 뛰어난 경제력을 자랑해야만 했고, 한국 경제개발의 모델은 무려 10년을 앞서간 일본의 데이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군부독재는 일본과 수교하면서 일본의 데이터와 차관을 기반으로 경제개발을 성취하며 국가의 부패와 비리로부터 사회개혁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게다가 조속한 시기 안에 민권이양을 완수하겠다는 대외명분 아래 등장한 활극의 정권이었다. 이 약속은 이런저런 핑계와 구실을 들어 18년 동안 지키지 않았다. 인권과 민주주의, 표현 및 사상은 물론이고 집회의 자유는 말살되었다. 온갖 비리와 타락은 만연했고 문화는 압살당했다. 한국의 체제를 정의하라면 쉽게 말해서 ‘전시 자본주의(wartime capitalism)’이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사회주의 국가를 주적(主敵)으로 삼아 전쟁에서 이기는 길은 반공의 기치 아래 자본을 무한대로 팽창시키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국민들은 적당히 치부(致富)만 해도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도취감에 빠졌다. 이 정권은 해결될 수 없는 온갖 사회적 문제를 적당한 표적에 혐의를 씌어 해결하곤 했는데, 그 희생양은 다름 아니라 개혁 성향을 띈 사회의 진보세력들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 정권의 수장은 부하의 총에 맞아 운명을 달리했다. 이어서 또 다른 군부 세력이 잠시 무주공산이 된 정권을 불법으로 침탈하려 했다. 그들은 민주적 선거로 지도자를 뽑겠다는 시민들을 총칼로 진압했다. 이 일은 1980년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광주 비엔날레의 고장 광주에서 일어났다. 광주 비엔날레는 이 지역민들의 트라우마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일종의 대규모 행정적 예술적 레퀴엠(requiem)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후 올림픽은 방패 한국을 강화하는 기초공사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었다. 너무나 뜨거운 경제적 팽창으로 눈부신 성장가도를 거듭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후예들이 경제적으로 승승장구할수록 학생들과 예술가들은 내면적 반감에 시달렸다. 마치 그들의 사상과 대척을 이루는 반대편에 진실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만연했다. 카를 마르크스의 서적과 체 게바라의 모험들, 평등과 인권에 대한 잠언들, 민족의 자각을 일깨우는 한반도 토착사상, 남미의 해방신학, 사회주의권의 문학예술이 반독재운동의 사상적 주축이 되었다. 그러다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와 1990년 동독의 흡수통일, 1991년 소비에트의 종언은 진보 지식인, 학생, 예술가 진영에 일대 혼란을 야기시켰다. 중국과 러시아의 수교로 그간 사회주의의 환상이 걷힌 진정한 실상을 대해 확인했으며, 정치적 체제도 종교적 위안도 예술적 이상도 허무라는 이름에 포위되었다. 다행스러운 한가지는 1993년부터 드디어 문민정부 주도의 민주주의를 국민 스스로 이루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희망이라는 새 비전조차 채 꽃피우기 전에 1998년 IMF 위기가 닥친다. 전국민은 어떤 사상이나 대안적 가치를 재무장하기 전에 글로벌리즘이라는 맹목적 경쟁주의에 덜미를 잡힌다. 미국이 제시한 새로운 세계 질서의 위용에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팍스 아메리카의 한국 내 실현은 1998년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미술의 분위기 역시 이러한 사회적 정황을 피할 수가 없었다. 군사독재 시절은 이치관념(二値觀念)의 시기였다. 예술에 그 어떤 정치적 발화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한국의 예술가들은 모노크롬 미술이나 미니멀리즘, 추상표현주의 등의 형식들을 각각 동양적 선(禪, zen)에서 비롯된 호흡, 유가의 수신(修身), 도가적 풍류(風流)와 연계해서 해석하려 했다. 말하자면 서구적 형식에 동양의 이름이라는 번역어를 덧씌운 이식구조였다. 둘째, 1980년의 기억으로부터 한반도 무속, 굿 등의 토착신앙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군부독재 자본주의의 병리를 해부한 민중미술(Minjung)이 세력을 확산시켰다. 이와 동시에 한국은 1985년부터 해외여행 및 해외유학이 자율화되었다. 그런데 1989년 이후 연속적으로 진행된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1993년 민권이양(民權移讓)의 확립, 그리고 최초의 보편적 유학파 유입 속에서 위의 두 세력은 동력을 잃었다. 1990년대는 서구미술의 무비판적 형식의 유입이 일반화되었다. 처음 보는 미디어, 영상, 사진, 설치 미술이 일대 홍수를 이룬 가운데 보는 이는 관전 포인트마저 설정할 수가 없었고 자체적 비평의 정신은 사라지고 서구 포스트모던의 잣대에 의존했다. 세계를 이끌던 두 개의 중심 기단(氣團)이 와해되고 다자적 양상의 포말(泡沫)로 분열되던 시기가 1990년이었다. 다원적 개인주의는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으나 좋은 예술가와 그렇지 않은 예술의 구분, 즉 전형과 모범이 사라진 시대이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 이러한 어지러운 상황에서 이용백이 전격적으로 등장했으며 그는 서도호(Doho Suh), 이불(Lee Bul)등과 함께 예술 형식의 자발적 창안과 한국 동시대 예술의 의미에 대해서 성찰한 작가들 중 하나였다.

2. 이용백의 예술과 작품

1990년대 이용백은 모든 포스트모던의 조건들을 거절했다. 포스트모던이란 모더니즘의 무기력과 권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충격 요법에 지나지 않으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서구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나온 사상적 쌍생아이듯이 포스트모던은 모더니즘의 육체에서 발아한 제 3의 변성된 육체이기 때문이다. 이용백은 한국과 아시아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자기 자양분으로 삼는다. 이용백의 예술을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던과 비교하면 그 특질이 명료해진다. 모더니즘은 기존의 법규와 명령(장르의 환원 불가능한 최종적 본질은 무엇인가 모색하라는 명령)에 기초해 이루어지는 완전히 합리화된 예술행위이므로(이성적 사유 중심) 언제나 재생산성을 띈다. 따라서 그것은 무색무취의 합리적 사유방식이다. 이에 반해 이용백의 예술은 본질적으로 자발적 창조이며 형성이다. 이용백의 창조는 ‘무(無)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주어진 사회적, 역사적 현실로부터의 창조이다. 때문에 이용백 예술의 기저에 언제나 잠재되어있는 사실은 그가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피동적 관찰자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가치를 발견하려는 적극적 발견자인 동시에 이를 예술이라는 구체적 형식으로 증현시키려는 행동자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그의 예술 속에는 아시아의 현실, 한국의 역사, 이 특정 지역이 세계와 마주선 관계, 21세기 세계의 시류 등이 포섭되는데, 그 형성 방법은 반드시 구체적이라기보다는 해석의 여운을 강하게 남기는 상징에 기반을 둔다. 이용백의 물질의 감각성과 의미의 다양성이 서로 밀고 당기는 게임을 벌이는 가운데 그 양자의 힘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기에 극도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특정 지역의 특수한 의미와 글로벌한 감각의 재료(matter)가 갖는 보편적 감수성이 서로 조우하면서 창발된 에너지의 유례는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일찍이 없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용백은 2007년 <뉴 폴더- 드래그(New Folder- Drag)>라는 작품을 베이징에서 전시했다. 컴퓨터상의 노란 폴더 형상은 과거 세계의 운영방법과 컴퓨터가 보편화된 현시점의 운영방법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대비시키는 일대 상징이다. 이 폴더를 거대한 크기로 확대한 조각이 ‘뉴 폴더’이다. 이용백은 이 폴더 조각을 여러 개의 통나무 위에 얹힌 후 베이징 외곽 빈민촌의 아이들에게 끌게 시킨 퍼포먼스를 진행시켰고, 이를 영상으로 촬영했다. 컴퓨터의 가상 세계에서 손쉽게 처리되는 모든 일들이 현실 세계에서 실재화될 때 얼마나 버거운 것인지 상기시켜주는 한편, 문화 장벽(cultural barrier)이라는 이름으로 대도시의 변방의 빈민들을 대도시 중앙에 진입시키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의 잔혹성은 물론 아시아에서 극도로 고조된 물신숭배의 기만성을 함께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극화된 미학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분명히 이용백은 디지털 테크놀로지 시대에 살고 있는 동시대 사람들의 의식의 굴절된 모순을 지적하지만, 동시에 그 모순마저 따뜻한 시선으로 감싼다. 그 힘든 노동의 퍼포먼스를 진행하면서도 이 빈민의 아이들은 시종일관 기쁨의 미소와 들뜸의 흥분을 숨기지 못한다. 이용백은 말버릇처럼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비관론에는 출구가 없다.”

<뉴 폴더- 드래그>를 뛰어넘는 또 다른 작품 역시 이용백이 이미 2005년에 그 토대를 완성한다. 그러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반성과 보완을 거듭하며 2011년 드디어 완결판이 나왔다. <엔젤-솔저(Angel-Soldier)>는 인간이 치세하는 위장(camouflage)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동물계의 생존수단을 인간계, 아니면 적어도 한국의 상황은 그대로 적용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명사로 충분하다. 바로 전시 자본주의(wartime capitalism)이다. 부도덕하고 명분 없는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간 국민들을 기만했다. 야만 사회주의 적대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경제적 압도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의 분배나 사회적 차별 철폐, 인권, 사상의 자유, 노동궐기의 자유 등은 뒷날을 기약하며 묵인되어왔다. 몇몇 재벌과 그 종사자들, 사회 중심세력 외에는 대부분 국민들이 보이지 않는 소외에 내몰림에도 불구하고 그 소외에 대해 인식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주류 미디어, 패권의 스포츠, 타락의 향연, 폐륜적 TV 드라마, 물신(物神)의 병적 신화,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득세한 한국형 대규모 교회, 연예인의 멋진 이목구비와 육체는 한국 사회의 천사이며 동시에 전사이다. 이 천사이자 전사인 무리들은 조화(造花) 정글(fake flower jungle) 속을 꽃무늬 군복을 입은 채 느린 속도로 서서히 잠입한다. 망각의 화려함으로 불편한 진실을 가리는 전략은 동물세계와 진정으로 유사하다. 이 작품이 세간에 처음 등장했을 때 비교적 남북관계가 온화하던 때라서 이 작품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 2011년의 시점에서 남과 북은 가열찬 신경질적 공방전을 거듭하면서 양자의 본질이 드러나고 있다. 적대적 공존과 본질의 은폐를 골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남북 모두 천사와 전사라는 이형동질(異形同質)의 위장 전략으로 생존한다. 작품이 상징하는 복잡한 사회역학적 관계를 떠나 작품의 사운드인 풀벌레 소리와 바람소리는 싱그럽기만 하다.

이용백의 또 다른 기념비적인 작품은 <피에타(Pieta)>이다. 모든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활동의 원형에는 희생양(victime èmissaire)의 기제(機制, mechanism)가 들어있다. 희생양의 메커니즘은 하나의 희생 타겟을 설정함으로써 여타 이외의 희생의 가능성을 막는 일종의 액막이이다. 동물로써 인간의 희생양을 막는 경제적 기능 외에 좋은 폭력으로 나쁜 폭력을 막는 주술적 기능도 함께 수행한다. 그리고 희생의 대상으로 설정된 희생양은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대상화된다. 이 희생양에게 희생양 이외의 공동체 전체 구성원은 격렬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더 큰 재난의 폭력을 미연에 정화하는 수단이다. 즉, 희생양은 상징적인 신에게 봉헌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폭력에 봉헌되는 것이다. 과거 유럽에서 경기 침체가 진행되거나 전체주의 파시즘이 완성되어가던 시기에 나타났던 유대인의 희생 문제, 미국 서부 개척사의 이면에 감춰져 있는 원주민 인디언의 학살, 1923년 관동대지진(The great Kanto earthquake of 1923) 때 자행되었던 6000명의 조선인 학살, 1980년 한국 광주의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의 공동체나 문명이 성장해갈 때 그 반발적 기운을 제거함으로써 나머지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자의든지 타의든지 지도층에 대해 긍정적 수긍 내지 체념적 방관을 하면서 상승 발전 무드로 고조되는 사회 분위기에 일조한다는 점이다. 어떤 시기의 어떤 문명이라도 수많은 수난을 발판 삼아서 재건된 물리적 집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동시대의 문명과 공동체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주지와 같이 글로벌리즘의 무한경쟁의 사회에서는 전인적(全人的) 자기 수신(修身)이 불가능하다. 동시대 사람들은 수량화된 개별적 개체로서 도구화된다. 개별적 개체로서 제도적 자유는 보장받지만 자기 인생의 풍부한 지평은 사형선고를 받게 되어있다. 동시대는 자기 희생의 시대를 암시한다. 즉, 이용백의 <피에타>가 어째서 사이보그를 연상시키는지 간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작품은 회화 시리즈
<플라스틱 피쉬(Plastic Fish)>이다. 이 회화 연작에 등장하는 플라스틱 물고기들은 화면을 전면적으로 가득 채울 뿐이다. 중심의 테마가 없는 무차별의 균등한 체계이다. 그 명목상의 균등함은 사실 혼란 그 자체이다. 진정한 진짜의 가치를 서로 낚아채려는 가짜들의 치명적 작태다. 서구에서 ‘명예(honor)’라는 단어는 도덕적 차원의 확립과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며 공동체에 봉헌하는 삶을 가리킨다. 맹목적 서구 추종에 여념이 없는 한국에서 명예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부로 오인되어있다. 서구에서 ‘사죄(sorry)’라는 단어는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강한 책임이다. 말과 다른 행동, 책임 없는 변칙의 표리부동함이 한국에서 사죄라는 단어이다. 임시변통으로 치부한 성공이 곧 명예인 사회에서는 미래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회화 연작에서 불온한 예감 말고도 희망의 예시도 잘 드러난다. 중심주의의 해체, 곧 다자적 가치의 사회가 한국사회에 아시아 사회에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체주의는 밀실의 공포극이다. 닫힌 공간에서 일방적 지시에 통제되는 사회이다. 그리고 이제 이 무서운 연극의 최종회가 종언을 알렸다. 최근 들어 다자적 가치의 민주주의, 개체의 운명을 전체의 명분과 동등하게 인정하려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이는 너무나 찬란한 것이다. 이 회화 역시 동시대 한국이라는 지역의 현재적 의미를 충분히 발현한다. 여기까지 살펴보았듯이 이용백의 최대 미덕은 자신의 감상주의나 개인적 취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의 모든 작품은 그가 세계에 대해서 실존적으로 확신한 의미를 매개한다. 끝으로 이용백의 예술이 한국에서 어떠한 위상을 갖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모노크롬과 미니멀리즘, 그리고 추상표현주의의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이치관념이 성장동력을 상실한 이후 1990년대 문민정부의 시기, 자기 토양의 자양분에서 발현된 형식이 아니라 외재(外在)의 외피만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신사조의 홍수가 한국 미술계를 덮쳤을 때, 그 누구의 판단도 잠시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서 분명히 이용백은 자기 가능과 한계의 벽을 명백히 인식하면서 그 벽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해왔다. 이 노력은 20년이 지나도록 변함없이 관철된, 스스로에 대한 요청이자 명령이었다. 2011년 현재 우리는 이용백의 예술여정을 목도하면서 어지러운 한국 미술의 혼란기에 어떤 예술이 좋은 예술인지에 대한 전형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어떤 예술의 형식이 그 형식을 발현시킨 예술가의 인생과 일치했을 때, 그리고 그 예술이 인생의 험난한 여정의 시행착오로 빚어낸 결과였을 때 비로소 예술은 진정성을 얻는다는 첫 번째 대명제가 그것이다. 둘째, 기존 예술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기존 예술과 지난 시대 사이에 엄존하는 내적 필연성이 무엇인지 정확히 명찰한 연후에 자기의 인생과 자기가 속한 시대의 내밀한 관계를 날카롭게 꿰뚫어 형식으로 발현시킨 예술을 우리는 아방가르드라고 규정한다. 이 아방가르드의 태도야말로 세계를 지속적으로 재건시킬 수 있는 동력이다. 셋째, 자기가 속한 시대와 사회적 정황의 모든 문제의 씨앗들을 동시대의 사람들이 호응할 수 있는 자기 감수성이라는 지반에서 발아시키려는 독창적 노고를 가리켜 예술가의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인데, 우리는 예술가가 세계에 대해 취했던 인생의 무게와 깊이가 작품 개체의 형식적 탁월함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거시적 관점을 언제나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들은 이용백이 보여준 25년 예술이력 덕분에 현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작지만 위대한 덕목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