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기술, 메타버스, 특이점, 챗GPT(ChatGPT)…. 거듭되는 기술 혁신 속에서 우리는 이미 기술이 인간의 역량을 초과하는 ‘변곡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언급대로 우리는 “기술의 발전과 혁신을 무효로 되돌릴 수도 없고, 우리가 사는 제품이나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바꿀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발전에 그저 비관하며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거절하거나,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지나치게 낙관하며 별다른 비판 없이 이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미래는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시대 예술의 역할도 이 지점에 착안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기계 작용과 같이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할 수 있는 정합적 논리 체계가 아닌 논리 체계 그 자체에 의심을 품고 체계의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사유활동이기 때문입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소변기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전시장에 진열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이 도구의 이름과 기능의 해체를 통해 우리에게 인식적 충격을 준 것처럼 예술은 기술이 기능하지 못하는 곳에서 작동합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예술이 던지는 물음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술과 기술,
상호작용의 역사와 내일
상호작용의 역사와 내일
제4호 SQUARE에서 다룰 내용은 현재 예술 및 정책 현장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인 <문화예술생태계를 위한 예술과 기술의 협력>입니다. 가장 먼저 소개하는 이원곤의 ‘경계에 선 예술과 기술, 그 어울림의 역사’는 이번 특집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글입니다. 이전까지 동일한 범주로 인식되던 예술과 기술이 산업혁명 이후 ‘기계’를 중심으로 ‘종분화’해 목적과 규범을 달리하는 이른바 ‘순수 예술’과 ‘산업용 기술’로 분리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이 같은 과정에도 불구하고 ‘사진술과 회화’, ‘미디어 아트’의 사례처럼 양자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예술과 기술이 서로의 개념을 확장하고, 나아가 새로운 범주를 창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설동준의 ‘융복합 예술의 파도에 필요한 정책 체계의 변화’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비롯해 여러 정책 집단을 중심으로 최근 예술 지원정책에서 주요한 정책 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이른바 ‘아트앤테크’ 지원사업의 현황과 과제를 비판적으로 접근합니다. 아트앤테크가 한 때의 유행에 편승해 명멸한 수많은 개념 중의 하나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진 하나의 생태계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개별화된 창작에 방점을 둔 생산 체계에 대한 지원을 넘어 유통과 평가, 새로운 창작자가 유입될 수 있는 학습 지원 등 협력 체계 및 문화 체계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과제로 주문합니다.
최진석의 ‘다중 진리 시대의 기술과 예술, 양날의 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우리의 지각과 경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기술의 발전과 이에 따른 진리 담론의 변화에 대한 예술사적 고찰을 담았습니다. 이와 함께 최근 문화예술계를 넘어 사회 모든 분야에서 화제를 독점하고 있는 대화형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챗-GPT’를 중심으로 참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탈진실 사회 속에서 기술이 새로운 예술의 대변자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기술 또는 기술과 결합한 예술이 진리의 은폐를 통해 우리를 억압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합니다.
황미옥의 ‘인공지능 예술과 저작권에 대한 법적 쟁점’은 최근 본격적으로 점화되고 있는 AI의 생산물과 관련된 저작권 이슈를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합니다. ‘인간의 창조적 힘에 기초한 저작 노동의 결실을 저작권의 본질로 정의’하는 상황에서 AI가 생산한 산물의 창작성 및 저작물의 인정 여부와 각국의 법적 태도를 소개합니다. 이와 함께 AI 학습 과정에서 그 기초가 되는 인간의 저작물 활용에 대한 저작권 보호 방안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며 기술 발전의 시대에 조응할 수 있는 입법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임태훈의 ‘기술에 감응한 창조적 영감의 극한’은 고도화된 기술 사회에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예술가들과 이들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퀘타(10의 30제곱, Quetta)로 대변되는 거대해지는 데이터 홍수 속에서 오히려 극도로 압축된 스몰 데이터의 사용 또는 아날로그 기술과 접합된 예술을 통해 과포화된 기술 사회에 저항하거나, AI에 ‘학습’이 아닌 ‘육아’라는 발상의 전환으로 인간과 AI의 우애를 지향하는 작업, 테크놀러지와 결합한 가상 신체를 통해 춤의 근본을 다시 묻고, 노이즈를 통한 일상의 소리 환경을 재인식하게 해주는 작업 등 동시대 예술과 기술의 실험이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글입니다.
김수현의 ‘거듭된 기술의 발전, 문화예술 향유의 새 지평을 열다’는 기술의 발전으로 변화된 예술 향유의 측면을 살피는 글입니다. 기술의 발달과 코로나 19 팬데믹을 계기로 가속화된 공연 영상화가 가져온 예술 접근의 용이성, 향유자 커뮤니티의 형성과 예술가와의 실시간 상호작용이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와 함께 기술과 융합된 향유 방식의 변화가 견인하는 예술 창작 양식의 다채로움에 대해서도 주목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첨단 기술의 활용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예술에 내재한 상상력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PRISM에 게재된 한하경의 ‘예술과기술융합창작지원 사업 현황 분석’은 2017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시행된 예술과기술융합지원 사업의 현황 및 나아갈 방향에 대해 사업의 참여자들에 대한 개별 심층 인터뷰 및 설문조사를 통해 분석하는 글입니다. 사업 참여자 구성 현황과 기술 융합 예술 창작 과정을 단계별로 구획하고 창작자들의 기술에 대한 인식 변화 및 창작활동에 미친 영향 등을 요연하게 정리한 연구를 통해 향후 예술의 미래 지평을 넓히고 해당 분야의 지속가능한 생태계 조성을 위해 필요한 요청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SCENE에서는 ‘유럽의 사례로 본 예술과 기술 융합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공연예술의 중심지인 영국에서 활동하는 김준영 아이러브스테이지 대표와의 인터뷰를 담았습니다. 예술과 기술의 융합 과정에서 언어 장벽이나 신체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을 활용해 예술의 확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긍정적 기대와 함께 기술의 진보로 예술생태계에서 벌어지는 자동화와 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기술적 실업(Technological Unemployment) 및 사람들 사이의 기술 격차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 등 우리 문화예술생태계가 곧 마주하게 될 미래에 대해 참조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의 주제를 서로 다른 시선으로 접근하는 FLOW에서는 시대와 장르를 막론하고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예술상의 면면을 담았습니다. 예술상은 예술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예술활동에 일정한 권위를 부여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하지만, 이와 동시에 예술 현장 내부 정치와 연동해 시상이 불공정하게 이뤄지거나 시상자와 수상자 사이에 위계를 형성하는 등 부정적인 면도 존재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예술상이 그에 내재한 권위를 빌려 새로운 예술적 흐름을 추동해야 한다는 것과 예술상의 권위와 그에 수반하는 권력 작용에 대한 고민, 이에 대한 비평의 역할, 예술상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예술적 실천이 돼야 한다는 요청 등의 내용을 시각, 문학, 공연 분야에서 활동하는 박지수, 황규관, 김일송 세 명의 필자가 집필했습니다.
예술과 기술의 어원이 ‘Ars’라는 공동의 조상에서 기원한 것처럼 예술과 기술은 동일한 유전 정보를 두고 서로를 휘감는 이중나선 구조와 같이 역사라는 시간축을 중심으로 서로의 존재에 상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입니다. 오늘날 예술과 기술이 끊임없이 서로 탐색하고 침투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필연적인 흐름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과 자연을 사물화해 기계에 예속시키는 자본과 기술의 대타항이기도 합니다. 이 경우 예술은 모든 생태적인 것들의 최종 수장고로서 기술과 거리를 두게 됩니다.
기술의 부정적 측면을 기능적으로 분리해 접근하는 무분별한 예술과 기술의 융합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이유입니다. A SQUARE 4호의 목적은 이처럼 우리 시대 예술과 기술이 길항하고 있는 지점을 점검하고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전망을 가늠하는 데 있습니다. 이번 호에 수록된 모든 글이 이런 물음에 해답의 실마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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