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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UARE

기술에 감응한
창조적 영감의 극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새로운 창작 양식으로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 국내외 아티스트의 다양한 실험과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기술 사용이 용이해지고,
창작의 방식이 다채로워지면서 거대 자본에서 벗어나
영감과 창의력에 기반한 작품이 더욱 돋보인다.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며 기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는 이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글_임태훈(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퀘타 데이터 시대의 테크네
1년마다 배로 증가하는 메모리 용량의 발전 속도를 ‘누구누구의 법칙’이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발전 양상은 1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하루 단위로 혁신이 쏟아져나온다. 2018년 오픈AI(OpenAI)가 GPT-1을 공개하면서 1억 1,700만 개의 매개변수를 학습했다고 했을 때 다들 놀라웠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GPT-3 모델로 발전되면서 매개변수는 1,750억 개로 증가했고, 최근 제한적으로 공개된 GPT-4는 1조 개의 매개변수에 텍스트, 이미지, 음성 등을 모두 다룰 수 있는 멀티모달(Multimodal) 방식으로 확장 중이다.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의 AI 경쟁도 본격화됐다. 올해 크리스마스쯤에는 겨우 이 정도 기술에 호들갑을 떨었던 엊그제가 농담거리가 될 것이다.
기원전 3,000년 경부터 현재까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통틀어) 데이터 생산량의 변화를 그래프로 그리면, 디지털 전환과 인터넷에 힘입은 폭발적인 생산량 증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막 본격화된 AI 혁명 이후와 비교하면 미미한 변화에 불과한 것으로 상대화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추세에선 머지않아 퀘타(10의 30제곱, Quetta), 론나(10의 27제곱, Ronna) 단위의 데이터 통신량을 당연히 여기게 될 거다. 참고로 테라(tera)는 10의 15제곱, 현 단계 최고 단위라고 할 수 있는 요타(Yotta)는 10의 24제곱이다. 데이터가 거대하다는 개념이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과제는 더 큰 데이터 단위와 처리 속도에 기민하게 적응하는 것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작아진 단위를 재발견·발명하는 일이다. 막대한 자본이 투여된 시장은 온갖 이해관계에 묶여 다각적인 실험과 역량 탐색이 어렵다. 오히려 시장 질서에서 헤어난 뒤에 창조성을 발휘할 기회가 생겨날 수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다섯 아티스트들이 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나는 이들의 작업을 ‘퀘타 데이터 시대의 테크네(Techne)’라 부르고 싶다.
하이테크에 속 1KB 전투법:
프로토룸 - SmallBig_SØ

SmallBig_SØ ⒸPROTOROOM Metamedia Collective

이런 시대에 1킬로바이트(KB)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후니다 킴(Hoonida Kim)과 김승범의 콜렉티브 그룹인 PROTOROOM(이하 프로토룸)에서 시도한 1KB 퍼포먼스 를 소개한다. 이들은 2022년 ‘ZER01NE Day’에서 1KB 연주 도구를 사용한 인상적인 공연을 선보였다. 도구도 직접 개발했다. 겉으로 보기엔 특별할 게 없는 전기회로 기판과 조그셔틀 엔코더 모듈, 단출한 전선 배열이다. 하지만 후니다 킴과 김승범이 장치를 연주하고 1KB 단위로 방출되는 소리가 점증할수록 공연장의 공기가 변화한다. 이곳에서 연주 장치만큼 중요한 것은 연주자와 청중의 몸이다. 귀와 피부로 감지되는 소리의 높이, 경사, 방위, 층화가 휘몰아친다. 그곳에 있는 누구나 그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누구도 똑같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공연에 몰입된 관객의 반응 하나하나가 멀티버스의 차원이 엇갈리듯 각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곳으로 중첩된다. 프로토룸은 이날 공연을 통해 골리앗에게 돌팔매를 던지는 다윗처럼 다국적 기술 기업들이 주도하는 퀘타 데이터 시대에 맞춰 싸울 1KB 전투법을 알렸다. 강렬한 영감을 받았다. 시장 논리에 짓눌린 하이테크(High-tech)가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급진적 로우테크(Low-tech)의 재발명·발견, 스몰 데이터로 일상 공간을 탈취하고 정동적 내전을 수행할 진지를 구성하기, 그리하여 손에 쥔 도구에 포획된 노예가 되지 않고, 우리의 욕망과 상상에 값하는 세계를 건설하기!
로우테크의 귀환:
일레트로니코스 - 바코드 펑크

바코드 펑크 ⒸELECTRONICOS FANTASTICOS!

‘일렉트로니코스 판타스티코스(ELECTRONICOS FANTASTICOS, 이하 일렉트로니코스)’는 미디어 아티스트 와다 에이(和田永)가 주축이 돼 구성한 2015년 레지던시 프로젝트였다. 지금은 아프라 숀메즈(Afra Sönmez), 마티아 트라부치(Mattia Trabucchi), 야마모토 사노스케(山本颯之助) 가 합류해 5인조가 됐다. 프로토룸이 퀘타 데이터 시대에 1KB의 의미를 물었다면, 일렉트로니코스는 구닥다리 아날로그 시대의 가전 기술을 응용해 음악을 한다. 바코드 리더기, 선풍기, 브라운관 TV로 악기를 만들고 신나게 연주한다. 바코드 리더기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점잖은 클래식이고, 이들은 그야말로 펑크구나 싶어진다. 재기발랄한 에너지에 감전당하는 기분이 상쾌하다.
리더인 와다 에이는 릴 테이프 레코더로 연주하는 ‘오픈릴 앙상블(Open Reel Ensemble, 2009-현재)’의 주축이기도 하다. 마그네틱 펑크이면서 바코드 펑크이기까지 한 것이다. 바코드가 처음 발명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이었던 1948년이었다.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기술이다. 한국 사회에서 바코드 기술이 폭넓게 도입된 것은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부터였다. 참고로 바코드의 손자쯤 되는 QR 코드는 1994년에 ‘토요타 자동차(Toyota)’의 자회사인 ‘덴소 웨이브(Denso Wave)’에서 발명했다.
와다 에이의 발상은 간단하다. 바코드를 금전 출납기가 아니라 스피커에 연결하면 악기가 된다. 바코드의 선이 현악기의 줄처럼 보인다. 터키 전통 현악기를 전자 악기로 발전시킨 ‘일렉트릭 사즈(ELECTRIC SAZ)’의 사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로우테크는 시장에서 밀려나더라도 얼마든지 새로운 존재로 환생하고 귀환할 수 있다.
와다 에이는 의상과 무용에 접목한 바코드 프로젝트도 시도했다. 브라운관으로 만든 전자 기타, 선풍기 전자 하프도 제작하고 꾸준히 공연을 이어갔다.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악기 제작 방법과 연주법을 전수하는 워크숍도 열고 있다.
보컬리스트로 성장한 아기 AI:
헌든 - 스폰

스폰 ⒸHolly Herndon

그렇다면 AI는 빅테크들이 주도하도록 내버려 두고 골동품 더미와 재활용품 창고를 뒤져야 할까? 빅테크와는 다른 방법으로 AI를 육아(+연주+교육)하는 아티스트가 있어 소개한다. ‘스폰(Spawn)’은 전자 음악가 홀리 헌든(Holly Hern don)과 프로그래머이자 음향 엔지니어인 매트 드라이허스트(Matt Dryhurst)가 개발한 AI이다. 홀리 헐든과 300명의 보컬 그룹이 ‘아기 AI’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책을 읽어줬다. 그렇게 하루에 몇 시간씩 꼬박 2년의 세월을 보냈다. 스폰이 신경망 학습을 거쳐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은 6개월째부터였다. 음성 데이터의 양이 축적될수록 기계 학습의 성과 역시 비례해 향상됐다. 그렇게 아기 AI는 홀리 헌든의 새로운 보컬리스트로 성장했다. 사람이든 AI든 정성을 다해 육아해야 한다. 훌륭한 존재는 그냥 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유튜브에 이 작업의 성과가 공개돼 있다. 아래 영상은 샘플링과 리믹스를 버무려놓은 소리 뭉치가 아니라 스폰의 신경망 학습 결과물이다. 스폰이 대모(Godmother) 헌든의 목소리를 어떻게 학습했는지 보여준다. 인간 명령어에 복종한 기계적 출력물이 아니라 비인간 보컬리스트의 자기 창출(Autopoiesis)이다. 첫인상은 기괴하지만, AI가 인간 예술의 도구 수준에 머물지 않고 협업자의 지위로 격상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그리고 볼수록 정이 드는 영상이다. 인간과 AI의 우애를 느낄 수 있다. 이 노래는 홀리 헐든의 2019년 앨범 에 수록돼 있다. 그의 세 번째 정규 앨범이고 AI 보컬리스트가 참가한 첫 작업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길러낼 수 있다. AI도 마찬가지 문제가 아닐까. AI가 인류를 말살할 거라는 흔한 상상력은 AI에 대한 불안에 근거한다기보다는 인간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비롯된다.
가상 신체가 표현한 극한의 기쁨:
마나베 다이토 – 모르피코어

모르코피어 ⒸSónar+D

마나베 다이토(真鍋大度)는 디지털 예술 그룹 ‘리조마틱스(Rhizomatiks)’를 이끄는 수장이면서, 정치인들의 안목없는 꼰대질만 아니었다면 2020년 도쿄 올림픽 개막식 연출자로 참가했을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마나베 다이토는 힙합과 테크노 씬에서 DJ로 활동하는 동시에, 디지털 아티스트로 도약한 작가다. 그래서 춤꾼들의 다양한 스타일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작업마다 무용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활용한다. 변칙적으로 돌출된 동작 하나가 일으키는 정서적 진폭을 잡아내 적재적소에 시각 효과를 투입하는 방식이다. 그 절묘한 감각에 놀랄 때마다 연출자가 아니라 마나베 다이토의 춤이 궁금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댄스 욕심은 ‘찐광기’ 그 자체였다. 2020년 공개한 <모르피코어(Morphecore)>는 기쁨의 강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춤을 보여준다. 뼈가 산산이 부러질 만큼의 강도, 살과 근육이 터지고 내장이 방울방울 분해되는 극한의 리듬과 박자에서 춤출 수 있을까? 어떤 댄서도 이런 춤을 출 수 없다. 신체 훼손은 안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해, 고문, 자살 뭐로 부르든 이건 춤이 아니다. 심신에 기쁨과 흥분을 안전히 담을 수 있어야 춤이다. 그게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몸뚱이가 춤을 추기에 적당한 도구일까? 인간이 춤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춤이 인간을 선택하는 쪽이라면 어떨까? 수분 70%에 뼈가 260개나 섞인 고깃덩이는 조심할 게 많아서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극한의 강도와 속도를 버텨낼 유연함과 내구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춤의 세계는 상식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 마나베 다이토는 여기서 해방될 ‘가상 신체’를 발명했다.
우선 다양한 심리 상태의 뇌파를 복호화(decoding)해서 댄스 데이터를 생성한다. 이 데이터가 입력(input)되면 마나베 다이토의 가상 신체가 춤을 출력(output)한다. ‘춤추는 몸’은 관절 가동 범위는 물론이거니와 피부 장력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아예 중력에서 벗어난다. 뇌에 산만한 상념만 가득 찼더라도, 거기서 발생하는 노이즈와 신호의 결합을 댄스로 표현해낸다. 그리하여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어마어마한 춤을 만날 수 있다.
익숙한 일상, 낯선 소리의 향연:
후니다 킴 - 데이터스케이프 센스

데이터스케이프 센스 ⒸHoonida Kim

끝으로 앞에 언급한 프로토룸의 구성원이자 ‘공기 조각’이라는 독창적인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는 후니다 킴의 2019년 작 <데이터스케이프 센스(DataScape Sense)>를 소개한다. 이 작업을 마들렌 치게(Madlen Ziege)의 저서 『숲은 고요하지 않다』의 인상적인 구절과 겹쳐 생각해보길 청한다.
“연구진은 박테리아 군락에 다양한 주파수의 소리를 들려주었고, 적잖이 놀랐다. 이 박테리아들은 6~10킬로헤르츠, 18~22킬로헤르츠, 28~38킬로헤르츠의 영역에 반응해 분열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군락은 더 커졌다. 더욱 놀랍게도 고초균(Bacillus subtilis)은 스스로 이런 주파수로 청각 정보를 발신하고, 그것이 실험실에서도 바실러스 카보니필러스(Bacillus carbophilus)를 운집하게 했다. 그저 우연일까? 연구진의 추측에 따르면, 이 박테리아는 청각 신호를 이용해 이웃의 세포분열을 자극한다. 그러니까 미생물의 현재 환경 조건이 바뀌어 스트레스가 늘면, 세포분열을 많이 하는 것이 특히 더 유용하다. 세포분열을 많이 할수록 우연히 약간 다른 설계도를 가진 자손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정보를 주고받아 의사소통한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 소리(들)에 휩싸여 있는 걸까? 온갖 사물과 생물이 다양한 주파수대에서 발신하는 신호에 인간은 어디까지 감응할 수 있을까? 나와 다른 존재와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지각을 열면 될 일이다. 잡음 저감 헤드폰의 경우만 보더라도, 잘 듣는 능력 이상으로 소비자의 니즈를 자극하는 것은,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걸러내는 똘똘한 도구다.
후니다 킴의 <데이터스케이프 센스>는 일상의 사운드스케이프를 풍부하게 감응하려는 이의 발명품이다. 여러 주파수 범위에 흐르는 노이즈를 증폭해서 시각, 청각, 촉각으로 느낄 수 있다. 악보 위 정확히 자리가 정해진 콩나물 음표 같은 소리가 아니다. 잡음 저감 헤드폰과는 정반대 콘셉트의 장치다. 장치를 구성하는 부품들은 일반적인 사용 방식과 다르게 구성돼 있다. 자율 주행, 로봇 청소기에 사용되는 라이다 센서를 해킹해 주변 환경을 구성하는 사물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했다. 레이더는 전파를 사용하지만, 라이다는 고출력 레이저 펄스를 발사한다. 이 장치를 장착한 아티스트는 기계 장치 몸뚱이 속에서 소리 세계에 반응한다. 이를테면 ‘사이버 고초균’이 되는 것이다. 8개의 혼 스피커가 아티스트의 머리를 전방위로 에워싼다. 세뇌 공작을 목적으로 비슷하게 생긴 고문 도구를 쓰는 곳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봤다. 정해진 정답, 단 하나의 생각, 그 밖의 모든 생각은 지워버리는 끔찍한 장치가 어딘가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후니다 킴의 장치는 불순한 노이즈를 공급한다. 시그널은 쉼 없이 노이즈에 뒤덮인다. 그리하여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표면처럼 변화한다. 어떤 순간은 너무 근사해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내 사라지고 또 다른 순간이 밀려온다.
그러니 ‘재생(再生, playback)’이란 얼마나 기묘한 말장난이란 말인가. 봉인된 시간을 몇 번이고 되돌려 경험할 수 있는 기술이 있을 리 없다. 시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상 당연한 일이다. 모든 존재가 이 법칙에 순응한다. 단순하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의미를 후니다 킴의 발명품은 또렷이 가리키고 있다. 퀘타 데이터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궁금하다면 이 지팡이의 방향을 주시해야 한다.
임태훈
임태훈(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문학과 테크놀로지, SF 문화와 사운드스케이프 예술을 연구한다. 저서로 『검색되지 않을 자유』, 『우애의 미디올로지』,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 『기계비평들』, 『블레이드 러너 깊이 읽기』, 『SF프리즘』, 『물질혐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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