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의 정의, 큐레이터 역할에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다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다
철조망, 모래주머니, 석유 배럴로 최전선 군사기지를 연상시키는 공간 한가운데 대안 법정이 들어섰다. 이 법정에서는 기후 위기를 식민주의와 자본주의로 인한 범죄로 인식하고, 정부와 기업에 그 책임을 묻는다. 배심원으로 참여한 미술계 관계자와 시민단체 활동가, 지역 공동체 주민, 변호사, 사회학자, 종교인 등이 이 법정에 둘러앉아 이어지는 증인들의 발언을 경청한 후 판결을 내린다. 이 재판정에는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동지로서 식민시대 이후 지금까지 멸종된 동식물이 세계 여러 지역의 국가와 기업이 저지른 기후 범죄의 목격자로 참석한다. 이른바 ‘인간 너머의 재판소(more-than-human tribunal)’이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의 네덜란드 파빌리온 전시로 선보인 본 재판소는 네덜란드 아티스트 요나스 스탈(Jonas Staal)과 인도 출신의 법학자이자 활동가인 라다 드수자(Radha D’Souza)가 함께 2021년 암스테르담에 처음 설립한 ‘세대간 기후범죄 재판소(court for intergenerational climate crimes, 이하 CICC)’의 한국 지부이다.1 이곳에서 3회에 걸친 증거 재판(evidentiary hearings)이 이뤄졌다.
세대간 기후범죄 재판소(CICC) Ⓒ청년기후긴급행동
최근 몇 년간 뮤지엄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급진적 예술 활동가 단체들에 의한 일련의 기후 행동은 뮤지엄을 식민지 장치이자 인류세 패러다임 장치로 바라보고 뮤지엄이 ‘다른 종류의 세계 만들기’에 앞장설 것을 요청한다.2 이들은 예술과 행동주의의 경계를 허물며 뮤지엄의 정의와 큐레이터의 역할에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기후 행동을 위한 새로운 뮤지엄 모델에서 큐레이터는 단순히 비정치적 관리인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아 지역사회 및 소외된 커뮤니티와 협력해 사회적 행동주의를 촉진한다. 이 글에서는 예술과 시민단체의 협업 방법론에 기반한 큐레이토리얼 실천으로서 <세대간 기후범죄 재판소(CICC): 멸종 전쟁>의 사례를 통해 기후 위기를 다루는 전시가 ‘민주적 포럼’의 형태로 어떤 종류의 전략을 사용할 수 있는지 살피고자 한다.
민주적 포럼을 위한 예술의 협업과
상호 의존, 그리고 돌봄 전략
상호 의존, 그리고 돌봄 전략
CICC의 핵심은 증거 재판(Evidentiary Hearings) 프로그램으로 형성되는 민주적 포럼에 있다. 요나스 스탈과 라다 드수자, 큐레이터와 지역 공동체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전시를 계획하고, 유럽 중심의 지식 구조와 제도적 관습에서 벗어나 미술관 내에서 지역의 문화와 문제를 제시하는 대안적 방법을 상상한다. 특히 CICC는 해당 법정에서 다루는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토착 문화 생산의 관점으로 토착 현실의 다양성을 제시한다. 한국, 네덜란드, 인도 국적으로 이뤄진 전시 제작팀은 큐레이션, 공간 연출, 증거 재판 프로그램에서 한반도의 군사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해 지역의 자연 생태계를 위협하는 군사 산업 복합단지, 신공항, 화력발전소 건설 등이 위치한 지역3의 토착민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전시를 구상했다.4
본 전시가 취한 대안 법정의 형식은 환경과 생태, 군사주의, 세계화와 관련된 분쟁을 가로지르는 민주적 포럼으로 서로 다른 입장에서 공통된 감성을 고양해 함께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왜 기후 범죄를 다루는 대안적 재판소를 뮤지엄 안에 설립하고, 실제 법정이 아닌 법적 효력 없는 뮤지엄에서 재판을 진행하는 것인가? 왜 예술가와 큐레이터가 변호사와 함께 시민단체 활동가, 지역 공동체 주민, 전문가 집단과 긴밀한 협업을 하며 공동으로 전시회를 계획하고 미술관 내에서 지역의 토착 문화와 생태 문제를 제시하는 대안적 방법을 상상해야 하는가? 이러한 형식의 예술 프로젝트가 마주하게 되는 상기 질문들은 근대적 사고와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현재 뮤지엄 제도 안에서 빚게 되는 마찰과 한계점을 드러낸다. 본문에서는 기후 위기 시대에 뮤지엄의 지식 생산과 교육적 역할에 주목해 CICC가 바라보는 탈식민주의적 사고 과정과 큐레이토리얼 전략을 살피고자 한다.
다종적 정의 실천을 위한
새로운 상상
새로운 상상
서두에 전술했듯 CICC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인간 및 비인간 공동체의 존재를 위협하는 정부와 기업의 기후 범죄를 다루는 ‘인간 너머의 재판소’이다. 요나스 스탈은 예술과 프로파간다,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다루며 ‘동지적 타자’로서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을 포괄하고 다양한 공동체와 연합을 구축해 정치적 변화를 이끄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권리라는 것이 개인의 사적 소유가 아닌 상호 관계 그사이(간격)에 존재한다’는 주장을 담은 라다 드수자의 저서 『권리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what’s wrong with rights?)』(2018)를 읽고 이 대안 재판소의 형태를 구상했다.5 이 책에서 라다 드수자는 계몽주의가 발명한 인권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한 근대법(modern law)이 인간과 자연의 분리를 제도화해 살아있는 세계를 재산으로 전환하고, 이후 유럽의 식민지 개척과 세계자본주의 건설을 위해 대량 절도, 살인, 노예화, 자원 추출, 인간 및 비인간 세계에 수많은 문화적 대량 학살을 부추겼다고 지적한다. 특히 근대법 체계에서 국가와 기업, 군대, 경찰 등을 포함하는 전문적 관료제도가 인간에게 부여되는 것과 같은 권리로서 법인격을 갖게 됐을 때, 자연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날카롭게 분석하며 권리가 개인의 재산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인간 간, 인간과 비인간 간, 또는 비인간 간의 관계로서 이해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강의 권리가 침해되면 현재와 미래에 그 강과 상호 의존해 살아가는 모든 동식물과 인간의 권리도 침해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요나스 스탈은 근대적 권리 개념이 상호 의존성의 원칙으로 대체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대안 법정의 형태를 상상하고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이 스케치를 기반으로 요나스 스탈은 건축가 폴 키퍼스(Paul Kuipers)와 ‘인간 너머의(more-than-human)’ 다종적 재판소를 설계했다. 이렇게 탄생한 CICC는 현행법 체계의 기초가 되는 선형적이고 개별화된 서술이 작동할 수 없는 구조로서, 인간이 아닌 조상을 포함해 모든 존재를 동지로 인식하게 한다. 국가와 기업이 저지른 기후 범죄를 기소하기 위해 지역 원주민이나 환경 단체들이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증거를 제공하고, 식민지 시대부터 현재까지 멸종된 동식물이 법정 여기저기 설치된 피켓과 깃발들에 이미지로 새겨져 기후 범죄의 증거이자 증인으로 자리한다.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언어로 동지라 불리면서 집단적 투쟁의 주체가 된다.
멸종된 동식물이나 화석 등 비인간 동지들이 증인이 되는 다종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라다 드수자와 요나스 스탈은 CICC가 공상적이거나 사변적 법정이 아닌 우리가 사는 땅, 그리고 현실에 뿌리를 둔 대안적 제도임을 강조한다. 라다 드수자가 작성한 세대 간 기후범죄법(Intergenerational Climate Crimes Act)은 상호 의존적인 생명체의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종의 멸종을 주도하는 근대 법을 무효화하고자 제정된 대안적 법안이다.6 3번의 증거 재판은 한국의 지정학적 특수성에 따른 군사주의나 군사 산업 복합단지를 통해 자행된 기후범죄를 기소하는 것으로 한반도의 과거 인간, 비인간, 현재 및 미래의 인간과 비인간에 저지른 부당한 행위를 알리자는 취지에서 대한민국 정부와 기업들을 심판 대상으로 삼았다.
‘군산 평화바람’, ‘전쟁없는세상’, ‘청년기후긴급행동’ 등 환경단체 활동가들이 증인으로 참석해 대한민국 삼척시, 베트남 하띤성의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이 인간과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그리고 국가와 기업의 단합이 어떻게 군산 등 해당 지역의 생태 및 공동체를 파괴하고 평화, 환경, 생계를 위협하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증언했다. 3시간의 심리가 진행된 후 라다 드수자, 류정화(공익 변호사), 지현영(환경 전문 변호사)로 구성된 재판부는 “세대 간 기후 범죄는 법인으로 활동하는 무리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해체하거나 문화를 파괴하거나 지역의 기후 패턴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등에 연루할 때 발생한다”고 명시한 세대 간 기후범죄법 제3조에 따라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는 대한민국 법이 허용한 기업의 활동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것으로, 궁극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재판정에 세운 것이다.
상호 돌봄의 전술
: 세대간, 상호의존, 재생하는
: 세대간, 상호의존, 재생하는
이 전시에서 수행한 큐레이토리얼 실천은 과거와 현재, 미래 세대에 걸친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사이 상호작용을 촉매함으로써 멸종된 동식물과의 연대, 소외된 커뮤니티와의 협력을 통해 사회적 행동주의를 촉진한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역사를 해석할 책임이 있고 담론과 지식 생산의 역할을 담당하는 동시대 큐레이터와 예술 기관은 식민지 매트릭스 내에서 어떻게 위치하며, 지식과 권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주체성을 되돌려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CICC는 큐레이션, 공간 연출 및 공개 프로그래밍에서 토착 문화 생산을 중심으로 한 관점으로 한반도 전역의 토착 현실을 심도 있게 다룬다. 한반도의 지역성 바탕으로 이 땅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다루는 전시는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에서 함께 무엇을 할 것인지를 그룹으로 생각하는 민주적 포럼을 통해 분쟁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해 공통된 감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페루의 사회학자 아니발 퀴자노(Anibal Quijano)는 식민성을 ‘현대적 착취와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과 함께 기능하면서 세계적 및 지역적 수준에서 인종 및 성별 계층을 생성하는 권력의 매트릭스’라고 지적한 바 있다.7 탈식민적 큐레이토리얼 실천은 근대성을 통해 지속되고 유럽 중심주의와 차별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식민 구조로부터 분리를 추구하는 윤리-정치적, 인식론적 프로젝트이다. 유럽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식민주의는 특권과 편견의 구조적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노동의 계급화, 불평등 및 인종주의의 확산 외에도 이러한 억압적인 계층은 문화 영역에도 만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현대 세계의 상당 부분이 서구 제국주의적 범주로 구성됐기 때문에 지식의 식민성은 훨씬 더 식별하기도, 극복하기도 어렵다. 지식이 식민화되면 앞으로 해야 할 과제 중 하나는 지식을 탈식민화하는 것이다. 탈식민주의적 사고는 유럽의 거대 서사로부터 구성되거나 그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 커뮤니티, 토착 문화에서 비롯된 철학적, 예술적, 이론적 기여에서 비롯된다. 지금 이 시대 요구되는 탈식민 큐레이터 관행은 인식론적 불복종을 옹호하고 유럽 중심적 담론과 범주를 대체 관점으로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당연한 관계에 주목하다
당연한 관계에 주목하다
라다 드수자와 요나스 스탈이 설립한 세대간 기후범죄 재판소(CICC)는 인류세라 불리는 이 시대가 맞닥뜨린 기후 위기가 바로 지난 500년 동안 지속돼 온 식민 위기이며, 이는 상상으로 만들어진 지배적인 법률 시스템인 근대법의 도움과 부추김을 받아 온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논쟁적인 역사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CICC에서 제시하는 세대간 기후범죄법은 동물이나 산, 바다의 권리(Rights)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당연한 관계에 주목한다. CICC의 증거 재판에서는 지역의 시민 생태조사단, 활동가, 토착민들이 해당 지역에서 인간과 자연 생태환경, 동식물이 어떠한 상호의존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지 증언함으로써 뮤지엄이 인간과 비인간 상호작용의 촉매 역할을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과 비인간 세계에 걸친 세대 간 상호 의존성, 회생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법적 상상인 세대간 기후범죄법의 비전은 법이 아닌 정의, 인간과 동물과 식물이 동지들로 모여 세상을 새롭게 재건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과 시민단체의 협업 방법론에 기반한 큐레이토리얼 실천으로서 CICC는 오늘날 전시가 민주적 포럼의 형태로 유럽 중심의 지식 구조와 법, 체제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사회정치적 돌봄의 회복력에 기반한 탈식민적 전략을 취한다. 뮤지엄의 탈식민화와 관련한 논쟁들은 여전히 수많은 질문과 풀리지 않는 이해관계가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지엄이 근대성을 통해 지속되고 있는 식민 권력으로부터 지역적 토착성을 분리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은 이러한 협업을 통한 상호 돌봄의 전술로 가능하다는 유토피아적 전망에 있지 않을까.
- ‘세대간 기후범죄재판소(CICC)’는 2021년 처음 암스테르담 문화예술기관인 Framer Framed(2021. 9. 25~2022. 2. 13)에 전시됐고, 2021-2022년 아르코-더치컬처 공동기금 한국-네덜란드 교류협력프로그램 전시(총괄기획자: 조주현)로 기획돼 ‘재판정에 선 법(Law on Trial)’이라는 제목하에 서울 문화비축기지 T4에서 몰입적 전시(2022. 11. 18~2023. 1. 1) 를 선보였다. 이후 2023년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네덜란드 파빌리온(2023. 4. 5~7. 30)에서 ‘멸종전쟁(Extinction Wars)’이라는 제목으로 몰입적 설치와 3회에 걸친 증거 심리 재판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 Colin Stering, ‘(Post) Anthropocene Museoloogies’, Drifting Curriculum 온라인저널, http://driftingcurriculum.org/a1#!/tab/482566735-1 참고
- 전라북도 군산, 강원도 삼척, 강릉 및 베트남 붕양 등
- 증거재판 퍼포먼스에서 한반도의 과거, 현재, 미래의 동지들은 기후범죄와 군수 산업, 신식민주의, 환경 파괴, 강제이주의 연관성에 주목해 대한민국의 정부와 기업을 기소했다. 재판은 세 명의 판사가 주재하고, 군산 지역의 평화바람, 전쟁없는세상, 청년기후긴급행동 등 다양한 분야의 활동가, 연구자, 전문가들이 증인으로 참여했으며, 관객이 배심원으로 초대됐다.
- Radha D’Souza, What's Wrong with Rights?-Social Movements, Law and Liberal Imaginations, Pluto Press: London, 2018. 참고
- 2022년 11월 서울 문화비축기지에 대규모로 설치됐던 CICC에서는 “재판정에 선 법(Law on Trial)”이라는 타이틀로 ‘근대 법’을 재판에 회부했다. 과거 서울시민들을 위한 석유 저장고였던 전시 공간은 그 자체로 화석 자본주의가 저지른 범죄의 증인이자 증거 현장이었으며, 폐기된 오일탱크, 배럴 등 화석 산업의 잔해 속에 구축된 법정에서 인간과 비인간 세계를 관통하는 세대 간 상호 의존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법적 틀을 제안했다.
- Aníbal Quijano, “Colonialidad del poder, cultura y conocimiento en América Latina,”Anuario Mariateguiano, Vol.9, 9, 1997;Aníbal Quijano, “Colonialidad y modernidad-racionalidad,” En Perú Indígena, Vol.13, No. 29,1992.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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