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서사와 기후 소설은 가능한가?
인류세와 인류세 서사에 대한 이해는 최근 들어 한국 문학 연구의 영역에서 새롭게 구체화됐다. 인류세 서사는 당연히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인류세는 유진 스토머(Eugene F. Stoermer)와 폴 요제프 크루첸(Paul Jozef Crutzen)이 ‘국제지구권생물권연구(IGBP)’ 뉴스레터의 기고문에서 제안한 뒤로 오늘날 빠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간단히 정의하자면 그동안 현세의 지질시대를 대변해온 홀로세(Holocene) 이후 인류 발전에 따른 극적인 지구 환경의 변화를 강조하는 지질시대 개념이다.1 인류세 개념은 기존의 자연환경이 인간 문명에 작용해온 방향과는 정반대로 인간 문명이 지구권의 자연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인류세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의 기후 위기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직결돼 있다.
인류세 서사가 지질시대에 대한 포괄적 인식적 전환을 대변하는 포괄적인 서사적 경향이라면, 그에 해당하는 대표적 장르가 바로 ‘기후 소설(Cli-fi)’2 이다. 기후(climate)와 허구물(fiction)의 합성어로 이뤄진 기후 소설은 미국의 작가이자 환경운동가 댄 블룸(Dan Bloom)에 의해서 정의됐다. 오늘날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인류세 서사와 기후 소설에 대한 이해 역시 확장되고 있지만, 인류세 서사나 기후 소설을 장르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문학사적인 흐름에서 언제나 새로운 용어의 주장과 활용은 때때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의 관습에 대한 리브랜딩이나 환원적인 덧붙이기에 불과한 경우 역시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개념들이 생산될 때는 장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장르는 동시대적인 현상이나 경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텍스트적 사슬로 구성된 문학사적 맥락과 계보 속에서만 사후적으로 재구성되는 개념이다.
물론 장르에 대한 이해에는 오늘날 많은 오해와 혼란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경향과 장르는 구분되는 것이며 특정한 서사적 경향이 충분히 관습화되면서 그 형식적 구성 요소들(도상(icon)과 이야기 문법(fomula))이 독자들에게 인지될 정도로 유지돼야 비로소 장르적 위상을 획득한다고 강조해왔다.3 하지만 분명 오늘날의 서사적 경향들이 그러한 역사적이고 규범적인 장르 이해와 달리 동시대적 현상 속에서 하나의 시도로서 독립적인 위상을 가지는 점에 대해서는 존중해야 하며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명확한 것은 장르라는 개념에 대한 혼란과는 별개로 특정한 서사적 경향을 대변하는 장르화 현상에 있어서 오늘날에는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덧붙여지는 것, 여러 가지 독립적 영역들의 추가적인 이해의 합을 고려해야 한다. 굳이 말하자면 ‘해시태그로서의 장르’가 그것이다.4 장르는 규범적인 구성요소의 합으로서만이 아니라 특정한 경향들을 대변하는 해시태그처럼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덧붙여준다.
사실 인류세 서사라는 개념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광대하다. 인류세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따른다면 오늘날 지구 환경에 영향을 미친 인간 사회에 대해 암시하는 모든 이야기는 사실상 인류세 서사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많은 소설들이 재현하는 구조적 현실에 오늘날 기후 위기에 대한 의식이 배경으로 존재한다면, 그러한 이야기를 굳이 인류세 서사로 정의하는 것의 장점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기후 소설에 대한 정의는 단순히 기후 문제를 다루는 소설이라는 것 이상의 섬세한 정의와 분류가 필요하다. 실제로 이 개념을 주장한 댄 블룸이 그러하듯 기후 소설은 의지적이며 능동적인 운동성을 포함한다. 기후 소설의 작가는 허구 서사의 창작자일 뿐만 아니라 기후 문제에 대한 선명한 정치적 의제를 가진 운동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후 소설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작가 자신의 자의식적 창작 의지라 할 수 있으며, 기후 소설의 작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소설적 주제와 정치적 의제를 교차시킨다. 하지만 기후 소설을 작가의 의지에 의존해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록 동시대적 경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특정한 장르화 현상에 포함된 텍스트를 살펴볼 때, 그 내용과 형식을 기술적으로(descriptive) 재정의하는 시도는 언제나 중요하다. 새로운 문학적 용어의 제창에는 그만큼 새로운 기술적 내용물들이 함께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기후 소설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기후 문제를 소설화하는 독립적인 형식성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형식적인 시도에는 당연히 다른 작품과의 차별성이 포함된다.
긴 문학사의 지형과 계보에 있어 유사한 장르는 한없이 많지만, 비슷한 경향에 속하는 작품들이라고 하더라도 모두가 같은 이름으로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5 사소한 차이에 의해서 장르적 경합 속의 우세함이 결정되며, 이것은 동시대적 현상에서 결정된다기보다는 사후적인 재평가 속에서 수행된다. 우리는 기후 소설에 해당하는 일련의 작품들이 SF 내부에서 그려지는 재난 서사 혹은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에 대한 이해와 병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기후 소설이라는 독립적인 이해가 구체화될 때, 결과적으로 기존의 장르와 차별화되는 영역들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기후 소설에 대한 사후적인 판단과 문학사적 의미를 구성하게 할 것이다. 넓게 보자면 이러한 문학적 명명은 단순한 리브랜딩이나 환원주의가 아니라, 장르에 대한 진화론적인 변화 속에서 발생하는 내적 투쟁이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논쟁을 유발하고 대화를 촉진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장르 명명이 가진 힘이기도 하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과 관련된 일련의 사회적 현상과 문학적 창작 과정이 병행하며 교차적으로 전진했듯이, 기후 소설 역시 오늘날 동시대적 현실을 통해서 문학과 현실이 교호하는 한 가지 사례다. 현상과 그에 뒤따르는 해석학적 과정에서 따라서 우리는 기후 문제에 대한 실체적인 문제들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고 매만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기후 소설이라는 지극히 의도적이고 자각적인 장르 명명이 올바른지를 묻는 것을 넘어서서, 그러한 쟁점이 촉진할 수 있는 의제를 문학장 내부의 논의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쪽이 현시점에서는 더욱 생산적일 것이다.
SF와 기후 소설 : 교차하는 미래학적 상상력
SF가 현재 기후 소설에 있어 일종의 동반자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한국의 문학적 지형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대부분의 기후 소설은 SF의 범주에도 속한다. 기후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들은 SF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후 위기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공통 전선을 구성하고 있다. 물론 이를 매개하는 것이 바로 인류세 서사라는 포괄적인 상위 영역, 혹은 교차적 매개물이다. 인류세라는 개념적 정의 아래에서 과학과 기후는 동전의 양면이거나,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특히 인류세 서사로서의 ‘SF 기후 소설’은 인류세의 개념적 이해를 가장 선명한 스키마적 인식으로 번역해 제공한다. 이때 작동하는 스키마(Schema)는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재현하는 시각적 물질성’이다.6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개념적 표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SF의 개념적 도구이기도 하다.
기후 위기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변화하는 지구군의 자연 환경이 아니라 기후 위기 자체를 외면하는 태도와 균열 없는 인식이다. 기후 소설은 바로 그처럼 우리의 현실 자체에 직접 개입하고 대중의 인식에 균열을 확장하기 위한 시도다. 하지만 여기에서 기후 소설은 자극적인 스펙터클의 활용이 아니라 우리에게 임박한 징후를 읽어낼 수 있는 스키마 활용의 적극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기후 소설은 전통적인 재난 서사와는 구별된다. 장르로서의 재난 서사가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재난과 그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전달하기 위한 시각성에 의존한다면, 기후 소설의 시점은 재난은 이미 일어난 이후이거나 일어나기 이전일 수도 있다. 기후 소설에서는 그 재현의 시간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재난에 대한 실시간의 시각적 재현에 우리의 인식이 압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기후 문제에 대한 인식적 충격이 부족해서 기후 위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기후 위기를 체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현실을 윤색하고 일상에 침입하는 균열을 시각적으로 메운다. 이미 우리의 현실에 작동하고 있는 편집적인 시각성을 고려한다면 애초에 시각성 자체를 통해서 인식을 바꾸겠다는 전략에는 한계가 따른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후 소설들은 단기적인 충격요법보다도 기후 위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지적인 스키마를 활용한다. 예를 들어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 2004)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Snowpiercer, 2013)는 선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전 지구적인 이상 기후에 따른 빙하기의 도래를 다루고 있지만 〈투모로우〉에서 재난에 대한 재현은 이상 기후가 가져오는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에 기대고 있으며 그 실시간 스펙터클을 재난 영화의 문법에 따라 그려낸다. 반면에 〈설국열차〉는 지구 온난화 극복을 위한 CW-7라는 인공 냉각제로 인해, 그 원작이 된 『Le Transperceneige』에서는 전쟁 종료를 위한 기후 무기로 인해서 이상 기후에 의한 재난이 발생한다. 중요한 것은 재난의 충격적 묘사가 아니라 이미 비가역적으로 변해버린 세계이며, 동시에 이미 일상화돼버린 재난 이후의 세계를 관객들에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처럼 전달하는 인지적인 스키마의 힘이다.
『Le Transperceneige』 Ⓒcasterman, 영화 <투모로우> Ⓒ다음 영화
이러한 인지적인 스키마는 시각성을 넘어 현재 우리의 구조적 현실에 대하여 사유할 수 있는 해석적 참여를 요구한다. 재난 서사와의 그 서사적 방법론의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기후 소설의 성격은 구체화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후 소설은 SF와 동질적인 측면이 있다. SF 역시 과학을 매개로 하는 사고 실험을 활용해 독자들에게 미래 사회에 대한 인지적 스키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후라는 매개물이 다소 상이할 뿐 두 장르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징후를 해석학적으로 읽어내는 방식으로 설득력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진다. 그중에서도 SF 기후 소설은 과학과 기후의 양쪽 영역에서 교차하는 소설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우리에게 점점 더 포괄적으로 설득력을 얻어가는 미래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게 됐다.
물론 기후 소설은 부분적으로 기존의 SF 하위장르로서 포스트-아포칼립스와 겹쳐 있다.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는 근본적으로 인간 과학의 산물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 그리고 근대인으로서의 인간성이라는 가면이 벗겨진 세계의 맨얼굴을 드러내는데 더욱 관심이 있다. 따라서 포스트-아포칼립스 서사는 멸망 이후 황무지의 정상성을 전제로 한다. 물론 그것은 현재 우리가 구가하고 있는 동시대적 현실의 정상성과는 다른 것이지만, 결코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인간 사회는 원시적인 수준으로 후퇴하거나 중세적인 암흑기 속에서 다시금 지역적인 패권 다툼에 골몰한다. 이러한 지역적 대립과 그 내부에서 갈등하는 인간성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의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부분적으로 포스트-아포칼립스의 주제 의식이 기후 소설과 맞닿아 있을 수는 있지만(핵 멸망 이후의 황무지 생태에 대한 재발견), 기후 소설의 근본적인 관심사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 포스트-아포칼립스로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2015)에서 임모탄이 지배하는 도시 시타델에서 그려지는 지하수의 독점 문제는 오늘날 환경 문제를 초래하는 부의 독점을 그리고 있지만 다소 부차적인 주제다. 반면에 〈돈 룩 업〉(Don’t Look Up, 2021)은 선명한 기후 서사의 영역에 있다. 이 소설에서는 명징한 기후 재난이 아니라 소행성 충돌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지적 스키마를 활용해 전체 서사가 명백한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임을 암시한다.
물론 오늘날의 기후 소설은 기후 위기를 경고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멸망에 대한 상상력을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사이버펑크 작가 월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표현을 바꿔 표현하자면 “멸망은 이미 도래해 있다. 다만 그 인식이 넓게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깁초엽의 소설 『지구 끝의 온실』(자이언트북스, 2021)은 대표적인 SF 기후 소설로서 이미 진행 중인 형태의 기후 재난에 대한 직접적인 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조차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기후 위기의 근본적인 조건을 다룬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현재의 현실을 바꾸지 않고도 무사안일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무감각과 망각이다. 이 소설에서 ‘더스트 폴’이라는 기후 재난은 나노머신을 연구하는 솔라리타라는 연구소에서 극도로 소형화된 자가 증식 나노봇을 만들던 중에 발생한 통제 불가능한 기술적 재난이다. 사이보그 레이첼에 의해 재배된 식물 ‘모스바나’는 더스트를 제거함으로써 재난을 종결지었지만, 다시금 안정화된 세계에서는 더 이상 어떤 실효성 있는 기능도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 잡초처럼 보일 뿐이다. 이 소설이 사람들에게는 거의 인식되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과거 멸망의 잔존으로부터 그 과거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적극적인 해석적 시도임을 강조한다면, 기후 소설로서 『지구 끝의 온실』은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성에서 지속되는 멸망의 기억을 끊임없이 현재화하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이 노력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끊임없는 개입과 실천의 과정이다.
『지구 끝의 온실』, 『이끼숲』 Ⓒ알라딘
거의 모든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인류세적인 상상력과 기후 소설의 의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뤄온 천선란의 최근 연작 소설집 『이끼숲』(자이언트북스, 2023)에 수록된 세 편의 소설들 역시 지상의 멸망 이후 지하도시로 내려간 인류의 미래를 그린다는 점에서 SF 기후 소설의 구성적인 세계관을 공유한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광합성이 잘 되는 단일 종의 나무를 심었던 생물학적인 대응은 실패하고, 오히려 ‘나무의 복수’로 인해 지하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인류의 현실은 『지구 끝의 온실』의 문제 의식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기후 난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미래 인류를 그리는 시도 속에서도 중요한 것은 어느새 지하도시 내부에서 일상화된 재난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계급적 소외를 생산하고 실제 자연을 모방한 가상현실로 사람들의 인식을 대체하려 한다. 재난으로부터의 충격의 회피와 의도적 망각 속에서 우리를 거대한 가상현실에 가두는 지하도시의 모습은 실상 지금 우리가 기후 위기를 회피하며 현실을 균열 없이 바라보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이끼숲』은 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서로 사랑하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러한 현실에 다시 충격을 가하고 균열을 가시화하기 위한 시도다.
기후 소설에 대한 경향을 읽어내기 위한 시도는 과거의 종말론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문학적 경향들의 불완전 연소를 새롭게 이어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000년대 파국적 상상력의 소설들은 오히려 그러한 파국조차 일상화하는 현실의 견고함을 크게 뒤흔들지 못했다. 현재의 기후 소설은 관점은 다를지언정 기후 위기라는 훨씬 더 실체적이고 선명해진 비전을 통해서 파국의 상상력이 관성화되고 일상화되는 무력화를 극복하려 한다. 상대적으로 잠재적이고 추상적이었던 파국의 상상력이 이제는 실체를 갖추고 구체화될 뿐만 아니라 파국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다시금 해석적 책임감을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끝, 종말(ending)에 대한 상상력은 다만 위기감을 강조하고 미래를 경고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지금의 기후 소설들은 일회적인 경고가 아니라 그들 소설에서 재현되는 미래의 파국과 오늘날 우리가 눈을 떼지 못하는 일상적 현실 둘 중에서 어느 쪽이 가상현실이며 눈속임인지를 묻는다. 뒤늦은 현실 파악이야말로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며 다시금 지금 우리 현재와 미래를 해석하기 위한 준비 조건이 될 것이다.
확장하는 기후 소설과 다발적인 장르화
앞서 『이끼숲』을 언급했지만, 천선란의 소설들은 기후 소설에 대한 여러 스펙트럼과 소재적 다양성을 제시한다. 특히 포괄적인 SF적 상상력과 포스트휴먼 및 타자와의 공존의 윤리를 다루었던 경향을 유지하면서도 『랑과 나의 사막』(현대문학, 2022), 『노랜드』(한겨례출판, 2022), 그리고 『이끼숲』에 이르면 기후 재앙과 생존한 인류의 기술 문명화된 삶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소설들은 분명 기후 소설과 SF뿐만 아니라 동시대 현실과 문학장에 의해 촉발된 상당히 넓은 형태의 정치적 의제들을 포괄하거나 암시하고 있다. 분명 기후 소설이 하나의 장르로서 사후적으로 재구성되는 방향은 앞으로의 문제겠지만, 지금 기후 소설은 여러 형태의 문학적 경향과 소설적 문제의식이 관통해야 하는 다발적 개념의 장르화 현상의 중심에 있다. 기후 소설과 SF와의 교차성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다양한 서사적 확산이 진행 중이다. 이는 최근 한국 문학장의 변화와 아주 긴밀하게 호응하는데 페미니즘 및 퀴어 문학의 지속적인 선전, SF 장르 서사의 약진,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 그리고 기후 위기에 대한 위기감까지 어느 쪽 하나가 우선한다거나 주도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동시대적인 의제로서 서로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종의 상호 보완은 한 명의 작가의 독립적인 작업으로서만이 아니라 특히 여러 형태의 앤솔로지의 형식은 물론이고 일종의 공동작업처럼 교차하며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보인다.
『랑과 나의 사막』, 『노랜드』 Ⓒ알라딘
대표적으로 『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문학과지성사, 2020)는 단순히 팬데믹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팬데믹을 통해서 확장되는 SF의 현재적 역할을 구체화하고 있다. 나는 과거에 재난 서사와 파국 서사 사이의 위치에서 팬데믹 서사에 대한 이해를 설정하려 했다.7 팬데믹 서사가 다루는 현실은 재난과 파국 사이의 긴장을 영원히 늘려 그사이에 새로운 일상을 획득하려 하는 인간적인 자기방어 기제와 닮아있다. 따라서 관성적인 현재에 균열을 내고자 징후적인 미래를 앞당겨 이미 도래한 멸망을 그려내려는 작업으로서 기후 소설의 핵심적인 태도는 팬데믹 서사가 놓여 있는 현실 인식과 교차한다. 바이러스는 단순히 인류를 파괴하는 이질적인 적이 아니며, 거대한 지구권의 생태적 환경 속에서 인간 역시 또 다른 의미의 파괴적 군체이기도 함을 받아들일 때 파국의 상상력은 더욱 구체화될 뿐 아니라 현재화될 수 있다. 수록작 가운데 듀나의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은 멸망 이후 지구권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새로운 바다 행성에서 살아가기 위해, ‘고래’라는 생명체 내부에서 부족화돼 살아간다. 하지만 군체로서의 고래 내부에 인간을 물리치려는 또 다른 개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처럼, 고래에게는 인간 역시 하나의 이질적 바이러스 역할을 수행할지도 모른다는 역전된 이해가 이 소설의 확장된 생태적 세계관을 제공하며 인지적인 스키마를 구성하는 셈이다.
『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알라딘
또 다른 앤솔로지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허블, 2021)에서 SF를 페미니즘과 함께 교차함으로써 더욱 확장하는 인류세 서사의 경향을 대변한다. 아예 ‘기후 위기 SF 앤솔로지’를 표방한 『일인용 캡슐』(라임, 2021) 또한 복합적인 기후 재앙의 상상력과 그에 대한 인류의 대응을 독립적이면서도 연속적인 방식으로 교차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김소연의 수록작 「가이아의 선택」에서는 기후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지킬 수 있는 인공지능의 다루는 시도를 통해서, 인류세만이 아닌 인공지능에 의해 새로운 생태계로 통합된 노바세(Novacene)에 대한 상상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또한 윤이안의 『온난한 날들』(안전가옥, 2022) 같은 경우는 기후 소설에 대한 작가의 의제를 선명하게 표명하면서도, 장르적으로는 SF와 미스터리와의 결합을 통해서 기후 소설이라는 다발적 장르가 포함할 수 있는 복합적 이야기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기후 소설을 단순한 소재주의로 주도되는 문학장의 일부 경향이라고만 정의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글을 시작하며 앞서 던진 질문에 대하여 다시 답해보자. 인류세 서사 혹은 기후 소설이라는 개념은 가능한가?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동시대적 현상으로부터 앞으로의 해석적 책임을 갖춰야 할 입장에서는 기꺼이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명명이 규범적이라기보단 담론적이며 정치적인 의제에 대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새로운 문학적 용어가 유포되고 설득력을 얻는 것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소설을 소비하고 읽는 독자들에 대해서도 논의에 참여하는 활기와 역동성을 부여할 것이다. 책임감 있는 동시대 작가라면 기후 위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멸망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기 어렵다. 불가피하게 우리 세계에 다가오는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들도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의 교차적이고 복합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신조어 ‘유스토피아(Ustopia)’8처럼, 미래는 교차적이고 복합적이다. 그것을 해석하기 위한 문학의 해석적 도구 역시 교차적인 성격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기후 소설 역시 동시대 문학적 교차점의 한 가지 이름이다.
- 김지성∙남욱현∙임현수, 「Anthropocene : on the starting point and the significance of the new geological epoch」, 대한지질학회, 『지질학회지』 52권 2호, 2016, 163-171쪽.
- 사실 더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이는 기후 허구물이라고 불러야 하며, 사실 소설에 제한되지 않는 더 많은 허구 서사물을 포함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기후 소설이라는 표현을 따르기는 하지만, 소설 이외의 기후 허구물을 포괄적으로 언급하게 될 것이다.
- 박인성, 「기지(旣知)와의 조우 :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SF를 위한 첨언」, 『자음과모음』 42호, 2019, 60-77쪽.
- 예를 들어 회귀물은 장르가 아니라, 오늘날 주도적인 이야기의 화소, 혹은 서사적 장치에 가까운 것으로 장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형태의 회귀 요소를 공유하는 와중에 장르에 덧붙여지는 해시태그적인 설명으로서 직관적인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가 강조한 것처럼, <햄릿>은 <고보덕>에 영향 받은 후대의 작품이지만 독립적인 위상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근대문학의 정전화 작업 속에서 숭고화됐다.
- Fredric Jameson, ‘In Hyperspace', London Riview of Books Vol. 37 No. 17 · 10 September 2015, pages 17-22.
- 다소 도식적일 수도 있겠지만, 재난 서사와 파국 서사 사이에 현재의 코로나 팬데믹 서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재난은 지속되지만 그렇다고 총체적인 파국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 팬데믹의 아이러니는 멸망에 대한 징후와 공포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삶을 견고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현실의 관성에 있다.” 박인성, 「과거도 미래도 말하지 않는 팬데믹 서사」, 남승원 외 9명, 역락, 2022, 51쪽.
- 마거릿 애트우드, 양미래 옮김, 『나는 왜 SF를 쓰는가: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에서』, 민음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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