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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OUND

예술가의 커리어 도약을 위한
제도와 정책의 방향

‘직업으로서의 예술가’에 관한 정밀한 규정이
부재하면서 예술가는 커리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거나
노동에 있어 제도적인 보호를 받는 일이 어렵다.
그렇다면 현장예술인들은 커리어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이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 겪는 고민과 어려움은
무엇일까? 예술가의 커리어 도약을 위해 필요한
정책적인 개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참여자_ 민소윤·장성욱·지경민·추수
  • 참여자_민소윤

    민소윤

    대금연주자,
    음악공장 노올량 대표

  • 참여자_장성욱

    장성욱

    소설가

  • 참여자_지경민

    지경민

    안무가,
    고블린파티 대표

  • 참여자_추수

    추수

    미술가,
    뮤직비디오 감독

ROUND 1

예술가의 커리어
Q. 예술가의 커리어가 일반 직업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민소윤 연주자나 작곡가의 경우 사회 진출을 하기 전에 기능적인 기반을 다져놔야 하므로 그 기능을 얼마만큼 수련했는 지부터를 커리어의 시작으로 보는 것 같아요. 짧게는 대학교, 길게는 중학교 때 활동도 커리어에 포함되고 어떤 학교를 졸업했느냐에 따라 활동 영역도 달라질 수 있죠. 그것이 이어져 대학교 졸업 후 관현악단 같은 공공 예술단체에 소속되거나 프리랜서 음악가로 활동하게 됩니다. 전통공연계에서 활동하는 프리랜서의 경우, 과거에는 공연을 발표하고 음반을 발매했을 때 소위 말하는 메이저의 눈에 얼마나 띄느냐가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SNS나 유튜브 같은 플랫폼을 통해 직접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특히 전통음악이 다른 장르와 결합하거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 받으면서 다양한 경로로 커리어를 확장하길 지향하는 추세예요.
장성욱 지금까지 문학은 전공이나 활동이 아닌 ‘등단’을 커리어의 시작으로 여겼기 때문에 다른 장르에 비해 시작점이 명확했어요. 그런데 인디문학, 웹소설 등으로 문학계 판도가 바뀌면서 커리어의 개념도 변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순수문학의 정석으로 여겨지는 등단 경로와 달리 다양한 채널에서 자기 작품을 보여줄 수 있고 책을 발간하지 않고도 수익을 낼 수 있죠. 하지만 웹소설 작가는 어떤 매체에 어떤 작품으로 등단했는지를 심사항목으로 보는 지원사업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딱 과도기인 것 같아요. 순수문학에 SF 같은 장르 소설도 포함되기 시작했고 웹소설도 장편소설로 발행하기도 하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모두 흡수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됐을 때 순수문학의 자생력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지, 무엇이 문학성의 개념인지 논의가 이뤄져야겠죠. 이 과도기가 지나면 문학계의 커리어의 의미도 달라질 것 같아요.
추수 시각예술은 변수가 많은 장르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희는 커리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지 않고, 사용하더라도 무척 넓은 의미로 쓰이거든요. 가령 다른 직업이 있어도 작품 활동을 하면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어서 ‘직업적인 예술가’의 개념을 단정 짓기가 어려워요.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가장 자유로운 영역이기도 합니다. 저는 예술가와 직업적인 예술가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요. 직업적인 예술가라면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 작품으로 동시대 예술의 발전을 계속 연구하고, 그것의 일부가 되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혼자 작업하는 사람도 넓게 보면 예술가일 수 있지만, 작품을 전시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직업적인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지경민 명확히 답을 내릴 수 없는 것 같아요. 일례로 제가 활동하는 무용단의 창단 기준도 모호해요. 사업자등록증에 기재된 날짜를 시작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전부터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춤을 춰왔어요. 제가 처음 춤을 춘 시기도 정확하지 않아요. 저는 현대무용을 정식으로 배우기 한참 전인 초등학교 때부터 스트릿 댄스를 해왔는데, 예술가로서의 커리어가 모든 예술 활동을 포함한다면 이 또한 커리어가 아닌지 애매합니다. 어떻게 보면 첫사랑과 비슷해요. 첫사랑이 누군가에겐 혼자 좋아한 짝사랑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와 정식으로 사귄 게 될 수도 있듯이 모두 개념이 다른 거죠. 그래서 여전히 커리어라는 말이 어색하고 경력이라는 것도 딱히 출발선을 정해두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Q. 예술가로서 경력을 증명하거나 커리어를 발전시키는 데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민소윤 직업 예술인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저는 특정한 보수를 받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30대 초반까지 누군가 요즘 뭐 하냐고 물으면 백수라고 대답했어요. “대금도 불고 작곡도 하고 연극 음악도 하고 공연도 만들어”라고 구구절절하게 얘기하는 게 변명처럼 느껴졌거든요. 경력을 증명하는 일도 비슷한 것 같아요.
지경민 우연히 교수 임용에 필요한 경력 채점표를 본 적이 있어요. 무용계에서 가장 중요한 스태프는 무대를 만드는 무용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채점표에서 안무가보다 무용수의 점수가 터무니없이 낮은 거예요. 공연을 만드는 데 있어 대체로 참여자의 역할 경계가 불분명하고 안무도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고 함께 구체화하기 때문에 안무가와 무용수를 나누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요. 그래서 저는 참여한 무용수를 모두 공동안무가로 이름을 올리는데, 단독안무와 공동안무도 점수가 다르더라고요. 이런 점을 볼 때 제도화된 인식 자체가 현장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죠.
추수 저는 그동안 해온 작업을 사진과 영상으로 차곡차곡 아카이브 해 둔 덕분에 경력을 증명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시각예술은 다른 장르에 비해 아카이브가 수월하니까요. 반면에 저희 아버지께서 전각가로 오래 활동하셨는데 작품을 만들고 연구하더라도 현대예술에서 기대하는 활동이 아니면 경력으로 증명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생활예술의 분야가 다양해지고 이를 부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늘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예술의 범위와 틀이 좁게 규정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민소윤 직업인이라면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주어진 업무를 이행하는 사람인데 스스로 책임을 부여하고 매일매일 계획된 바를 이행하기가 쉽지 않아요. 자유 안에서 자기만의 체제와 체계를 만들어내야 하죠. 그리고 프리랜서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경력, 연차가 아닌 실력, 능력이잖아요. 오래 했다고 해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반응이 좋은 작품을 계속 무대에 올리는 일이 더 많아요. 사회와 동떨어진 예술을 하는 경우도 많고요. 모든 예술이 사회성을 지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가가 커리어를 인정받으려면 예술의 깊이를 갖추는 동시에 사회를 향한 이타성의 폭을 넓히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추수 제 생각에 커리어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은 생계 유지가 아닐까 싶어요. 저는 국내외 대학을 다 졸업했는데 어디든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작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5%도 채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5% 중에서 90% 이상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작업을 하죠. 운 좋게 전시 기회를 얻더라도 투자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판매는 이뤄지지 않죠. 구체적인 현실은 미처 알지 못한 채 당면하니까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장성욱 지망생들 대부분이 등단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등단하고 나서부터 진짜 가시밭길이 시작돼요. 작가는 늘 선택을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아마 작가 중 자기 주도적으로 책을 발간하는 작가는 손에 꼽힐 거예요. 많은 작가가 커리어를 지속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도 글을 쓰지만, 출판계도 힘든 상황이라 검증되지 않은 작품을 꺼립니다. 그래서 요즘은 여러 작가의 작품을 담은 앤솔로지(Anthology)를 출판사에 제안하는데 이것도 팔릴 만한 주제를 다뤄야 하는 점에서 주객이 전도된 부분이 있죠. 문예지도 천차만별인데 소설 한 편에 15만 원을 주는 일도 있고, 원고료로 농산물로 주는 농담 같은 일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어요. 예술이 선택받아야만 보여줄 수 있고 실력이 아닌 출판사와의 관계 같은 외적인 부분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이 안타까워요.

참여자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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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ND 2

지원정책과 커리어 발전
Q. 흔히 지원사업에서 구분하는 예술가의 커리어 범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민소윤 2020년 서울문화재단이 지원사업을 개편하면서 A, B, C트랙으로 커리어 범주를 구분했어요. 지원 목적을 예술인으로서의 작업세계 형성, 안정화, 가치 확장으로 나눴는데 예술가 스스로 내가 어떤 트랙에 적합한지를 생각해보고 소명할 수 있다는 점, 세대별 구분을 연차가 아닌 경력으로 한 점에서 좋은 변화였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지원사업에 참여하기 전에 예술가 스스로가 신진인지, 중견인지 판단해야 예술적 성장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죠. 단순히 사업자등록증이 5년 이하라고 해서 신진으로 머무는 것은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을 스스로가 차단하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이러한 경력의 범주가 지원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나눠지는 것이지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을 신진, 중견이라고 생각하며 작업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다만 창작활동의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한다는 지원사업의 목적을 봤을 때 청년예술인에 대한 지원이 난립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빈부격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 공모 대상사업 Ⓒ서울문화재단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 공모 대상사업 Ⓒ서울문화재단

추수 저도 공감하는데 서울문화재단 지원사업에 참여할 때 활동한 기간에 상관없이 자기가 판단해서 트랙을 선택하는 게 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또한 많은 지원금을 원하면 알맞은 트랙에 지원하고 그에 따라 더 쟁쟁한 실력의 작가들과 작품으로 경쟁하는 점이 좋았습니다. 특히 어린 작가들에게는 지원사업 안에서 경쟁해보고 지원금을 받는 게 앞으로의 경력에서 큰 발판이 되기 때문에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해 지원할 수 있는 사업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지경민 최근 해외에서 주목받은 안무가들이 무용수 출신이 아닌 경우가 많았어요. 무용수로 활동한 사람이 안무를 만들면 춤을 추는 입장을 생각하게 되는데 무용수 경험이 없다면 그런 한계가 없으니 춤을 출 때 무리가 될 수는 있더라도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안무를 만들게 돼요. 한국에서도 이를 롤모델로 삼고 안무가를 무용 비전공자에서 찾을 때가 있었는데 문제는 무용을 전공하지 않은 안무가가 안무만 공부한 뒤 자기 경력을 증명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거예요. 반대로 그러다 보니 무용수 출신의 안무가들이 무대에 설 기회를 얻기 위해 안무를 하게 되는 경우도 생겼어요. 춤만 추고 싶은 사람도, 안무만 하고 싶은 사람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어요.
장성욱 문학은 보통 등단한 지 10년 이내인 신진과 그 이상인 중견으로만 나뉘는데 등단 시기가 명확해 어디에 속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어요. 수치로 따지면 신진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그 이유는 10년 넘게 버티는 작가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연차로 나누다 보니 억울한 사연도 있어요. 문학 작가들은 등단일이 각각 다른데 1월 1일에 등단하는 신춘문예는 1년을 오롯이 커리어로 가져갈 수 있지만, 하반기에 등단할 경우 2~3달 만에 바로 2년 차 작가가 돼 버립니다. 아무래도 신진 작가 지원이 많다 보니 이런 말도 나오는 거겠죠. 개인적으로는 신진과 중견 사이에 한 트랙 정도가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중견이라는 말을 작가들이 싫어하기도 하고요.
Q. 정책적 예술 지원사업이 커리어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예술 지원 정책이나 사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요?
추수 제가 볼 때 한국은 예술가를 위한 지원 정책이 잘 정착돼 있는 것 같아요. 해외의 예술가들에게 국내 지원사업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러워하는 것을 종종 보거든요. 지금 한국 예술이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도 지원정책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특히 청년예술인들이 커리어의 발판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고 봐요.
민소윤 저는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인 ‘신나는 예술여행’을 통해 ‘섬아리랑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섬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역 민요에 담아 그 섬만의 아리랑을 만드는 프로젝트로, 그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지금도 계속 이어가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전공하고 어떻게 보면 관성적으로 음악을 해왔는데 이 프로젝트를 통해 진정으로 예술가로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께 참여한 모두가 큰 보람을 느꼈죠. 저는 지원사업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가가 예술 활동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되는 제도인 동시에 공공이 수혜를 입으니까요.

섬 아리랑 프로젝트 Ⓒ노올량

장성욱 지원사업이 문화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더 많은 예술가의 커리어를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단편영화 제작 경험을 기반으로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죠. 지금 당장 문화 향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대중적 보편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해서 이를 없애면 그만큼 전체적인 예술의 가능성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기초(순수)와 상업, 주류와 비주류로 불리는 것 모두 예술의 범위 안에서 인정하고 지원사업 안에서도 공정한 경쟁이 이뤄져야만 예술이 발전하고 예술가의 커리어도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경민 저도 공감해요.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든 거절하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비보잉 단체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시작하기 전에는 하기 싫었어요. 제 말을 안 들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데 막상 시작하니 너무 즐거웠고, 덕분에 올해 파리 올림픽에 브레이킹 초청 공연도 가게 됐어요. 지원사업은 예술가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영역까지 창작의 가능성을 넓히고 예술가가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해요. 물론 그 가치를 만들어내는 건 예술가 스스로의 몫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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