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전공생의 미래는 무직?
학부에서 경영학과 회화를 전공했던 나는 두 학문의 속성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두 학과의 가장 큰 차이점을 알 수 있었는데 경영대생은 취업 준비에 몰두하는 반면, 미술대생은 졸업 전시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점이다. 졸업 전시는 미술대생들에게 마치 전부이자 대학에 입학한 이유처럼 보인다.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졸업 작품에 몰두한다. 그런데 막상 졸업 전시를 마치고 학사모를 던질 때쯤, 뜻밖의 고민에 맞닥뜨린다. 그것은 취업이 아닌 졸업과 동시에 학교에서 제공받은 실기실이 사라지면 앞으로 사용해야 할 작업실을 구하는 문제이다. 유독 성분을 포함한 유화물감을 사용할 수 있는, 석고 덩어리나 나무를 마음껏 깎고 조립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지만,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이들에게 레지던시 공모에 당선되기란 꿈같은 이야기다. 미술대학 졸업생들은 동기, 선후배들과 삼삼오오 모여 공동 작업실을 구하는 것으로 사회의 첫 출발을 시작한다. 이 같은 이유로 미술대생들은 새 학기 때 이뤄지는 졸업생 대상 취업률 조사에서 대부분 프리랜서 작가, 다른 말로 무직으로 파악된다. 취업률이 저조한 미술대학은 입학 정원을 감축하거나 학과 통폐합에 내몰리고 결국 예술가란 ‘미래가 불분명한 직업’, ‘생계유지가 어려운 직업’으로 여겨진다.
지난 1년간 자유계약자 종사 여부 Ⓒ2021 예술인 실태조사
2021 예술인 실태조사1에 따르면 전업 예술인의 비율은 57.4%에서 55.1%로 감소했고, 자유계약자(프리랜서) 중 겸업 예술인의 비중은 67.9%에서 72.2%로 증가했다. 한 가지 흥미로우면서도 의아한 점은 여러 매체에서 이 같은 사실을 마치 문제라는 듯이 바라보는 점이다. 예술인 중 프리랜서의 비중이 높은 점 또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안으로 여기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물론 예술인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있음을 함의할 수도 있고, 더 나은 해결책을 위한 관점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이 남는다. 예술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오히려 겸직과 겸업을 장려하는 추세인데 예술 분야는 왜 그렇지 않은가? 한국을 제외한 OECD 국가 중 경제 수준이 높은 국가일수록 고용시장에서 프리랜서 비중이 높은데 유독 한국, 그중에서도 국내 예술 분야에서는 왜 정규직을 선호하는가? 낮은 보수나 과중한 업무 등 열악한 환경으로 겸직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내몰렸을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러한 경우들이 많다. 그렇다면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수많은 예술인들은 이 어렵고 험난한 창작 활동을 계속 이어가는가? 왜 수많은 예술 매개자들은 만족스럽지 않은 급여임에도 예술 분야에서 종사하는가?
가치 충돌이 아닌 순환
예술 세계와 기업 정신의 동행
예술 세계와 기업 정신의 동행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지표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몇 가지 사례를 나의 경험에 기반해 공유하고 싶다. 시각예술가 오연진 작가는 예술 분야 안에서의 양성평등, 나아가 예술인들 간의 연대를 지향하는 비영리 단체 ‘여성예술인 네트워크 루이즈더우먼’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수백 명의 예술인이 거쳐 갔으며, 지금도 회원들의 지속적인 후원과 펀딩을 통해 탄탄한 네트워크로 거듭나고 있다. 또한 이 단체는 창작 활동을 하는 예술인뿐만 아니라 큐레이터, 기획자 등 예술 종사자 모두를 아우르고 있어 나 또한 2년 전부터 참여하고 있다. 오연진 작가는 미션에 공감하는 수백 명의 예술인의 연대를 이끌어내는 비영리 단체의 운영자인 동시에 전시를 통해 꾸준히 신작을 발표하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예술가의 능력과 재능이 사회에 여러 방면에 퍼져가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판화를 기반으로 창작활동을 이어온 정원철 작가는 최근 경기도 양평에 ‘칼산공방’을 만들었다. 대형 장비나 특수 설비가 필요한 매체를 다루는 시각 작가들이 ‘공방’이란 이름으로 작업실을 운영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가 칼산공방을 만든 이유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마을 주민 모두가 예술을 접하길 바라며 ‘모두를 위한 공방’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접 칼산공방에 방문해 그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들을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표지석 프로젝트’가 있다. 정원철 작가는 전통적으로 토착 지역민들이 구구이 불러오던 지역 고유의 이름들이 세월이 지나며 사라져가는 것에 주목했다. ‘칼산’이라는 바위산 이름도 사라져가는 고유 명칭인데 공방 앞에 우뚝 선 이 산의 빽빽한 나무숲 사이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위가 그들에겐 칼처럼 보였을 테니 그 명칭에 금방 공감이 갔다. 삶의 속도가 느리던 시절에 촘촘히 붙여지고 일상적으로 불리던 마을의 옛 지명을 되살리기 위한 표지석들을 칼산공방의 모인 이들이 간직하기로 했다. 이처럼 과하게 빨라진 삶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바꾸는 시도 하나에서도 우린 예술가의 미적인 역할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런 예술가가 거주하는 마을은 강퍅해진 마음을 달래며 슬기로운 생활을 이끌 수 있다. 마을의 구성원들이 점차 예술적으로 융화되는 모습이 더욱 기대된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고 유통하는 전반적인 과정을 이끈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주체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자원이 풍부하지 않음에도 어떻게든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방식은 스타트업의 구조와 비슷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신이 세운 목표와 미션을 집요하게 이어가는 예술가의 의지에서는 창업가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예술인의 삶의 방식과 태도에 기반해 ‘예술 기업가 정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예술 기업가 정신은 미국 등 여러 해외 예술교육 과정에 적용되고 확산하면서 예술가가 자기 삶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술 기업가 정신은 현재 학자마다 다르게 정의하고,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는 생물 같은 개념이기에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 것을 지향하지만, 몇몇 학자의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
“예술기업가정신은 예술을 기반으로 혁신을 주도하는 태도 혹은 의식이나 마인드로서 예술창작, 제작, 배급과 향유, 재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적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다.”
박신의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고황명예교수
“예술기업가정신은 문화예술 영역 종사자들이 자신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유지하고 적응력을 향상하며, 예술적,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영 과정이다.”
장웅조 홍익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 마거릿 위조미르스키 (Margaret J. Wyszomirski,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명예 교수)
“예술기업가는 이윤 동기가 없는 경우에도 예술적 미션 실행에 따른 자기 성취감에 의해 동기 부여될 수 있다.”
스테판 프리스(Stephen B.Preece,Lazaridis School of Business and Economics)
앞서 살펴본 두 사례 역시 이 같은 예술 기업가 정신과 닿아 있다. 예술인 실태조사에 드러난 부정적인 지표와 달리 이들은 자기 삶과 창작이라는 행위를 동일시하며 이어가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나아가 그러한 예술인의 기업가적 태도는 예술 분야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 다시 한번 지표의 오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사회 구조에서 짜여진 직업인의 정의로는 예술인들의 다양한 커리어를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정확함과 효율성을 요구하는 이 사회에서 모호함과 비효율성을 감수하며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들이 만들어내는 무형적인 가치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과연 이뤄지고 있을까? 무직으로 기재되는 예술 전공 졸업생들을 그저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 옳은 해결책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지표 너머에 있는 예술의 가치
예술 전공 졸업생들의 창발적인 사고와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프로젝트를 만들어내는 태도를 사회가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면 어떨까? 홍콩에는 아트바젤(Art Basel) 기간에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슬로건이 있다. 바로 ‘HK WALLS’ 프로젝트를 위한 ‘당신의 벽을 기부해주세요(Donate Your Walls!(linktr.ee/HKWALLS)’이다. 대중이 많이 다니는 벽을 소유한 사람이 벽의 사용권을 기부하면 지역 그라피티 예술가들이 이곳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생활 환경 개선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그라피티 양성화나 홍콩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겠다는 목적으로 보이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벽을 예술로 공유함으로써 정서적 벽을 허무는, 국제도시 홍콩의 포용적이고 자유로운 정치적 지향점을 알리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국내에는 저소득층 아동들이 방과 후 예술가에게 악기를 배우며 음악을 통해 성장하는 ‘꿈의 오케스트라’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업에 참여하는 예술가는 자신의 본업이 침해받지 않을 수준에서 방과 후 교사로 활동하며 교육인으로서의 삶도 살아간다. 실제로 ‘꿈의 오케스트라’에 함께하는 음악인들의 연수를 담당했던 나는 방과 후 수업의 유지와 예체능 전공 졸업생 취업에 있어 매우 효율적인 방식임을 확인한 적이 있다.
HK WALLS 2023 ⒸHK Walls
이제 문화예술 사업과 프로그램의 성패 여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관계 부처의 의지와 예산 편성에 달려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예술가의 낮은 처우와 인식 개선이라는 똑같은 결론과 비슷한 해결책으로는 지표 그 너머의 가치를 추구하는 창발적인 인재들을 포섭하기 어렵다. 골든 타임이 지나가고 있다.
-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는 3년 주기로 예술인 실태조사를 발간하고 있다. 해당 보고서를 통해 국내 예술인들의 소득 수준과 현재의 창작 환경을 살펴볼 수 있어 정책 수립 시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 송남은(2022). 이펙추에이션(effectuation) 관점에서 본 무용가의 예술기업가정신 : 현대무용가 차진엽의 내러티브 탐구를 중심으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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