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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설에서 확장하는 문화 역량
물리적 접근성이 중요한 이유

지역 간의 문화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많은 연구와 정책이
이뤄져 왔음에도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문화 관련 인프라가
부족한 이른바 문화시설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다.
지역 공동체의 문화활동 욕구를 충족하고
문화 향유 만족도를 높일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
글_안태호(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문화 기반 시설,
문화 향유를 위한 첫 번째 조건
20대 정부의 국정과제 ‘일상이 풍요로워지는 보편적 문화복지 실현’의 기대 효과에는 ‘국민의 소득·지역별·연령별 문화 향유 격차(문화예술관람률 소득별 격차 2020년 50.6%, 지역별 격차 17%) 완화 및 국민 삶의 질 제고’라고 정리돼 있다. 거주지를 비롯한 삶의 조건에 따라 문화 향유의 격차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문화 향유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 가장 큰 것은 관련 시설의 유무이다. 2014년 지역문화진흥법이 제정된 후 생활문화 영역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지만, 공연이나 전시 등 관람형 문화예술의 비중은 여전히 크다. 생활문화 영역 또한 연습 공간을 비롯해 시설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비중이 높다. 문화 기반 시설 건립 정책은 시설을 기반으로 한 활동 증가를 가져오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예술 활동과 공급의 다양성을 증진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또한 중앙정부에서 지자체별로 문화 기반 시설 공급 정책을 펴 지역의 문화 향유 격차를 줄이는 데도 기여했다.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던 1970년대 이후로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립 문화시설의 확충은 정점을 찍었다. 공공도서관의 경우 1960년대까지 23개에 불과했으나 이후 1970~1980년대 142개, 1990~2000년대 527개가 증가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0 전국 문화기반시설 총람에 따르면 현재 지자체에서 운영 중인 공립 도서관 수는 모두 876개에 이른다. 박물관은 1980년대까지 15개에 불과했으나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며 223개의 공립 박물관이 들어섰다. 현재 국공립 박물관은 430여 개가 설립돼 있다. 문예회관의 경우 1970년대까지 3개에 불과했으나 1980년대 24개가 들어서며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 후 1990년대와 2000년대 154개가 더 확충되며 현재 256개가 운영 중이다. 미술관은 상대적으로 증가 폭이 더디게 진행됐다. 1980년대까지 2개에 불과했던 미술관의 수는 1990년대 7개, 2000년대 25개 확충 이후 현재 73개의 국·공립 미술관이 운영 중이다. 지방문화원은 230개, 문화의집은 101개 운영 중이며, 최근 생활문화센터가 문화의집을 대체하며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전국 문화기반시설 연도별 현황

전국 문화기반시설 연도별 현황 Ⓒ2020 전국 문화 기반 시설 총람

전체적으로 보면 도서관과 문예회관, 박물관, 지방문화원의 경우 거의 모든 지자체에 설립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지역별 편차는 존재한다. 각종 인프라를 갖춰 인근 시설 활용 가능성이 큰 광역시의 자치구를 제외하면 2020년 기준으로 진안, 무주, 임실, 함평, 영암, 신안, 청도, 봉화 등의 지자체에 문예회관이 없다. 평창, 철원, 서산, 계룡, 장수, 곡성, 화순, 무안, 함평, 영광, 영천, 영덕, 성주, 사천 등에는 공립박물관이 없다. 인천 남구를 제외하면 공공도서관이 없는 지자체는 없고, 계룡시를 제외한 모든 지자체에 지방문화원이 설립돼 있다. 이 중 문예회관은 지역에서 현실적으로 복합문화공간과 유사한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화 기반 시설이 문화 향유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그러나 문화 기반 시설의 건립과 운영이 주민의 생활권과 괴리돼 있다는 비판, 시설 간의 중복 문제, 인구수와 행정구역 단위를 근거로 한 천편일률적인 건립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향후 문예회관을 포함한 문화시설의 입지와 공급 기준으로 주민의 이용 횟수나 거리, 편의시설과의 연계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연구들이 이뤄졌다. 이는 결국 행정권역 내에서의 이동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실제 교통망과 생활권을 기준으로 한 접근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우리가 항상 경험하는 일이다. 인천의 부평구와 부천시는 길 하나를 마주하고 있다. 부천시 쪽에 있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상동호수공원의 이용자 상당수는 부평구민이다. 생활권과 이동 수단에 따라 인접 시설을 이용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민들의 삶은 행정구역으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문화 향유 ‘확장’을 위한 조건,
시설의 질적 성숙
기반 시설의 확충을 넘어 운영의 질적인 측면에 고민을 심화해야 하는 것도 문화 향유 정책 방향의 또렷한 한 축을 차지한다. 애초에 설립 계획 단계에서 시설 규모나 유형, 향후 운영을 위한 장기 계획, 예산의 조달 방법, 전문 인력의 운용 등의 검토 없이 만들어진 시설은 지자체에 예산과 운영 부담을 가중시킨다. 몇 해 동안 지자체의 미술관 신축 관련 논의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앞서 본 통계 자료처럼 문화체육관광부가 집계하는 문화 기반 시설 중 가장 설립이 부진한 것이 미술관이다. 현재 미술관과 박물관 신설을 위해서는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따라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또 미술관들은 주기적으로 인증 절차를 거친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제시한 지표에 따라 일정 기준을 충족해야 인증 미술관으로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지역에서 신규 미술관을 만드는 과정은 여전히 체계화돼 있지 못하다. 기존 공립 미술관 역시 체계적으로 관리 운영되고 있지 못한 것도 분명하다.
미술관뿐만 아니라 많은 시설에서 여전히 건립 이후 콘텐츠 전략이나 수요 확보의 고민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인력 운용 계획 역시 부실하다. 특히 문화예술 영역에서 전문 인력을 활용해 양질의 콘텐츠와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운영의 전문성을 기하는 것보다 공간을 문제없이 잘 관리하느냐에 초점을 맞춘 공간을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 전문인력을 쓰지 않고, 새로운 활동이나 콘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하니 예산을 크게 쓸 이유가 없고, 작은 예산으로는 공간을 관리하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하지 못하니 그만큼 시민의 문화 향유 기회가 줄어들게 된다. 종사자들은 예산과 인력 문제를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애초에 예산과 인력이 뻔한 상황에서 시설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 없이 시설부터 설립한 지자체의 판단 착오를 이야기해야 한다.
다양한 수요를 확인하고
담아내야 하는 이유
과거 문화활동은 공연이나 전시를 관람하거나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시민의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문화 욕구도 다양해졌다. 공공 영역에서도 그러한 문화 욕구에 대응할 필ㄴ요가 높아졌다. 대표적인 것이 전국에 170여 개가 운영 중인 생활문화센터이다. 물론 생활문화센터 이전에 문화의집이 생활 속 문화공간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생활문화센터는 문화의집이 만들어낸 성과 위에서 이를 대중적으로 확산하고 시민이 문화활동을 삶의 일부로 영위하는데 중요한 매개고리로 발전했다. 이처럼 지역의 문화시설 수요는 무척이나 다채로워졌다. 최근 많은 공간들이 문예회관과는 결이 다른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하며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는 이유다.
변화한 수요 중 하나는 영상과 관련한 요구일 것이다. 영상미디어센터가 설립돼 운영 중인 지역들도 있지만, 소수에 그치고 있다. 인터넷 보급과 SNS의 확산, 특히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 제작 수요가 증가하며 영상 해석을 포함한 디지털 리터러시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많은 군 단위 지역은 아직 영화관이 없다. 혹은 앞서 말한 시설들처럼 접근성이 부족해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작은 영화관이나 공동체 상영 등의 방식은 이 같은 지역의 결여를 메우고 영상 언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지역과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
이전까지는 문화 기반 시설과 문화 향유를 공공에 맡기는 것 말고는 방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민간 시장이 성장하며 새로운 트렌드가 부상하고 있다. 공공이 민간 문화영역과 교류하고 협력하는 과정은 시민의 문화 향유 효율과 질을 높이는 데 필수 요소가 됐다. 예를 들어 보자. 많은 도서관이 ‘희망도서 바로대출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공공도서관 사서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떤 책을 구입할 것인가’이다. 기껏 구매한 책이 시민들로부터 외면받으면 곤란하다. 물론 미처 발견하지 못한 양서들을 소개하는 것도 사서의 업무지만 대출 횟수가 적은 책만 구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도서관의 도서 구입 주기가 너무 길다. 당장 신간을 읽고 싶지만, 쏟아지는 신간을 매일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광명시 지역서점 희망도서 바로대출 서비스

광명시 지역서점 희망도서 바로대출 서비스 Ⓒ광명시 뉴스포털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동네 서점을 이용할 수 있다. 시민들은 도서관과 협약을 맺은 동네 서점에 원하는 책이 있는지 검색하고 책이 있을 때 서점에 가서 책을 대출해 읽은 후 도서관에 반납한다. 도서관은 향후 그 책에 대한 대금을 서점에 정산해 준다. 시민들은 원하는 책을 바로 읽을 수 있어서 좋고, 도서관은 시민들이 원하는 책을 구입할 수 있어 좋고, 동네 서점은 매출이 올라서 좋다. 이 모델이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하다. 공공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시대는 지났다. 대중의 다변화된 문화적 욕구에 대응하려면 민간 서비스에 공공이 적절히 개입하고 조율하며 소통과 협력을 통해 최상의 모델을 만들어내야 한다. 공공과 민간이 협력해서 서비스를 만들어내면 시민의 만족도가 훌쩍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례다.
지역과 협력하는 사례들을 더 많이 만들어가야 한다. 한동안 민간 시설과 공공시설의 갈등으로 공공이 무료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며 지역 생태계를 망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는 여전히 조심해야 할 문제다. 공공이 민간 영역의 생계를 위협해서는 곤란하다. 최근에는 동네 책방이나 카페, 작은 공방 등 지역을 거점으로 기능할 공간이 많아지고 있다. 문화 향유를 공공시설에만 가둬 둘 필요는 없다. 민간과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할 방법을 찾아 지역의 이슈에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공간을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
공공기관에서 활동하는 종사자 역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있는 공간을 그대로 내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이를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김해문화재단이 올해 선보였던 ‘불가사리 프로젝트’를 예로 들 수 있다. 불가사리 프로젝트는 김해문화의전당 공연장 비수기에 지역 공연예술 단체들이 그 공간을 활용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도록 연계한 사업이다. 이는 지원사업 영역에서 논의할 수도 있었지만, 직접사업 형태로 공간이 가진 가능성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활용, 운영했다. 정책 차원에서 지역 문화 기반 시설 종사자의 재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해야 할 이유다. 시설운영자의 경우 대체로 보수적인 경향을 띤다. 시민 안전을 확보하고 인프라를 점검하는 업무 특성상 기존의 관례를 지켜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설관리자들이 유연함을 갖추고 공간 활용도를 높이면 시민들이 공간을 바라보는 시야도 확장될 것이다.
김해문화재단 불가사리 프로젝트

김해문화재단 불가사리 프로젝트 Ⓒ김해문화재단

유휴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점검도 필요하다. 한동안 폐산업시설 등 유휴공간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사업이 유행했다. 지금도 지역에서 유휴공간을 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사업이 활발히 이뤄진다. 시민의 문화 향유 측면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방법인지 되짚어봐야 한다. 버려지고 방치된 원인을 진단하지 않고 섣불리 개조한 공간이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시민의 생활 동선과 동떨어진 경우도 많고, 기능 중복이 우려되는 곳도 적지 않다. 물론 SNS가 발달하면서 명소가 된 곳은 늘 수요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수요는 대개 상업적 시설의 몫이지, 공공정책으로 만들어낼 것은 아니다. 도시의 활력과 시민의 문화 향유 확장에 적절한 시설인지 점검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문화공간은 그저 도시 외관을 장식하는 곳이 아닌 시민의 생활권과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20대 정부가 출범한 지 7개월이 지났다. 국정과제나 업무 보고 등에서 문화정책의 일단이 드러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정책 방향은 또렷하지 않다. 2년 차 이후 예산 운영을 확인해야 할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편으로 ‘지역의 문화 자치’라는 대원칙이 ‘약자 복지’로 대변되는 이번 정부의 정책과 맞아떨어지는가 의아하다. 문화정책이 현장의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이 아니라 공급 위주의 시혜적 정책으로 치우칠까 우려된다. 그저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안태호
안태호(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한국문화의집협회 이사, 연수문화도시 총괄 기획자. 몇몇 기관과 단체에서 문화정책 및 기획 관련 일에 관여해 왔다. 음풍농월, 미음완보의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을 몇 해째 꿈만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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