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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예술인의 직업적 권리에 대하여
예술인 고용보험이 필요한 이유

지난 5년여간 문화정책 영역 안에서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는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의 도입이다. 물론 많은 예술인이
그 효용을 아직 체감하지 못하고, 다른 지원정책과 달리
복잡한 행정 절차와 요건들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예술인 고용보험은 한국의 예술인 복지제도 설계의 출발점이자
지속 가능한 제도 운영의 근간이므로 반드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글_하장호(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인복지위원회 위원)
예술인 복지에서 예술인 고용보험까지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의 의의는 예술인 복지제도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국내에서 예술인 복지와 관련된 유의미한 첫 행보는 2003년 시작됐다. 당시 정부가 발표한 ‘예술 현장을 위한 역점 추진과제’를 통해 예술인 지원방안 마련을 추진하면서 정책화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는 2007년 예술인 복지정책 수립과 관련한 정책 연구와 개발 과정으로 이어졌으며, 예술인공제회 설립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또한 예술인공제회 모델과는 별도로 해외 사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예술인 고용보험 모델 도입 등의 방안을 함께 검토했다. 공제회 모델이 재원 확보의 어려움으로 무산되자 예술인 고용보험 모델을 통한 예술인 사회 안전망 구축을 대안으로 논의했다.
이후 예술인 복지에 관한 논의는 국회로 이어져 정병국, 서갑원, 전병헌, 최종원 의원 등이 예술인복지법안을 발의했다. 법안에는 예술인의 사회보험 가입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는데 4개 법안 모두 고용보험법 가입 특례 조항을 포함했으며, 일부는 산업재해보상법, 국민건강 보험법 적용 특례, 예술인 복지기금 설치 내용까지 담고 있다. 이를 위해 예술인에 대한 ‘근로자’ 의제 적용을 방법으로 제시했으나 관련 부처의 반대 등을 이유로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2011년 최고은 작가의 죽음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예술인의 처참한 현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입법이 이뤄졌다. 그러나 기존 4개 법안을 대폭 수정하면서 예술인의 사회보험 가입 특례와 관련한 것 중 산업재해보상법 가입 내용만 담겼다. 법안에 따라 정책 과제를 만드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그 책임을 떠넘기면서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2017년 예술인 복지정책 종합토론회

2017년 예술인 복지정책 종합토론회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당시 많은 현장 예술인과 정책 전문가는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 확립과 직업적 권리 보장이란 관점에서 예술인 복지정책을 설계해야 실효적인 지원이 가능하며,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음을 지적했지만 끝내 반영되지 않았다. 이후 설립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고용보험 제도를 대신할 수 있는 예술인 지원 사업을 주요 사업으로 설계해 운영했으며, 저소득 위기 예술인을 위한 긴급 복지 지원사업(현 창작준비금 지원사업), 예술인의 소득을 보조하는 개념의 파견 예술인 지원사업, 실업 시기 교육 지원 성격의 학습공동체 지원사업 등을 시행했다. 그리고 사회보험 제도 중 유일하게 예술인복지법에 담긴 산업재해보상법 제도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대행하는 형식으로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는 예술인 복지가 제도화돼 안정적으로 운영되기보다는 ‘예술인 복지의 지원사업화’라는 점에서 계속되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이 같은 정책적 취약성은 박근혜 정부 당시 불거졌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로 폭발했다.
문화 예술계 안팎의 문제 제기와 함께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형 엥떼르미땅 제도’라는 이름으로 예술인 고용보험 도입을 공약했다. 출범 초기 수립한 ‘문화비전2030, 사람이 있는 문화’에서 9개 의제 중 하나로 ‘문화예술인·종사자의 지위와 권리보장’을 통해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 도입을 공식화했다. 이후 민관 TF가 만들어지고 3년여간의 기나긴 논의 끝에 2020년 12월 10일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가 시행되기에 이른다.
예술인 고용보험 도입의 의미
예술인 고용보험은 제도 도입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서 몇 가지 중요한 지점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와 직업적 권리가 처음으로 인정돼 제도화됐다는 점이다. 과거 예술인은 문화예술진흥법 등을 통해 정책 대상으로 호명되기는 했지만 사회적 위치와 권리를 인정받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유명 예술인의 사망 보험금을 산정하는 과정에서 예술가를 직업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무직으로 판단해 보험금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예술활동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그만큼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예술인 고용보험 도입은 이러한 무관심을 넘어 예술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온전한 시민으로 설 수 있는 중요한 토대라 할 수 있다.

예술인 고용보험 안내 영상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둘째, 안정적 재원 확보를 통해 지속 가능한 예술인 복지정책 시행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과거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통해 시행했던 고용보험을 대체하는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일반 회계 예산을 통해 시행된 만큼 지원의 규모나 안정성, 정책적 효용성 등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인 고용보험 도입으로 고용보험 재원을 예술인에게 지원할 수 있게 되면서 재정적 안정성을 높이고 정책의 지속 가능성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셋째, 문화정책의 확장과 고도화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과거 문화정책은 ‘예술창작’과 ‘문화향유’라는 두 영역 안에서 작동했다. 창작 분야의 정책은 주로 예술의 수월성이나 가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데 초점을 맞췄고, 이와 함께 문화 향유를 목적으로 한 콘텐츠 공급에 대한 지원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예술인 복지정책 도입, 예술인 고용보험 시행의 과정을 거치며 기존의 창작을 중심으로 한 정책과 이를 수행하는 창조적 주체로서 예술인에 대한 정책으로 구체화했으며, 이를 통해 예술 생태계의 성장과 안정을 위한 정책적 단초를 마련했다.
사라져 버린 예술인 복지정책
그렇다면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통해 시행된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가 순항하고 있을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새롭게 출범한 제20대 정부의 관련 정책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난 대선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문화정책 공약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지역별 문화격차 해소 및 지역 중심 문화 자치 시대 개막, 전 국민 문화 향유 시대 확립으로 문화기본권 보장, 공정하고 사각지대 없는 예술인 맞춤형 지원, K컬처를 세계 문화의 미래로 발전, K컬처 스타트업 지원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는 문화산업 선진국 도약, 전통문화유산을 미래의 문화자산으로 보존하고 가치 제고, 제약 없고 공정한 장애예술인 활동 기회 및 가치 제고가 그것이다.
이 중 예술인 고용보험과 관련한 정책은 ‘공정하고 사각지대 없는 예술인 맞춤형 지원’으로 세부 공약으로 저소득층 예술인 고용보험료 차액 지원, 불합리한 계약 관행 해소, 청년 예술인 활동 지원, 공정한 지원 체계에 근거한 다년 집중 지원 강화, 생애주기별 맞춤형 지원 등을 제시하며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는 제20대 정부 출범 이후 발표한 120대 국정과제 목록에서 문화정책 관련 7개의 과제 중 ‘공정하고 사각지대 없는 예술인 지원체계 확립(57번)’으로 담겼다. 이전 정부의 국정과제나 문화정책 비전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보다는 구체성이 떨어졌지만, 선거 당시 공약까지 놓고 본다면 예술인 고용보험에 대한 정책적 고려와 계획을 기대하게 했다.

새정부 문화정책의 방향과 과제 토론회

그런데 지난 9월 19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된 제20대 정부 문화정책의 방향과 과제 토론회 이후 기대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이틀간 진행된 토론회에서는 예술 창작, 지역 문화정책, 문화 향유, 콘텐츠, 관광 분야의 의제만 논의됐으며, 예술 창작도 창작 환경 중심으로 유통 지원과 예술시장 활성화, 기초예술과 타 산업간 융합, 창작 발표와 유통 플랫폼 강화, 예술가 자립 지원 정도만이 논의됐다. 예술인 고용보험을 포함한 예술인 복지정책이나 예술인 지원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상 전무했다. 물론 이 토론회만으로 정부의 문화 정책 전체를 포괄하는 계획이 수립된다고 볼 수 없지만 현 정부 문화정책의 주요 의제에 예술인 고용보험과 예술인 복지 문제가 사라졌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예술인 고용보험 주요 통계(2021. 12. 2) Ⓒ고용노동부

지난해 고용노동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예술인 고용보험 누적 가입자 수는 9만 5,000명 이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보인다. 그러나 고용보험 수혜자의 규모나 내용을 보면 여전히 정책 안정화까지 더 많은 논의와 시간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특히 문화예술 종사자 중 많은 수를 차지하는 공연예술 분야 종사자들의 가입률은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또한 가입자의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소득이 높은 방송·연예, 영화 분야 예술인이라는 점은 적극적인 정책 대응이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 정책 시행 이후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의 안정화와 지속적 운영을 위한 체계와 논의 구조가 사라졌다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정부의 주요 정책 의제에서도 예술인 고용보험과 예술인 복지정책이 보이지 않는 현재 상황은 오랜 시간 힘겹게 쌓아 올린 예술인 복지정책이 또다시 표류하게 되진 않을지 우려된다.
예술인 고용보험을 위한 제언
정책 수립을 위한 공론화 과정에서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 나아가 예술인 복지제도에 관한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다음 주제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첫째, 예술인 복지정책의 새로운 전망 구축이 필요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를 제외한 예술인 복지제도는 고용보험 제도가 시행되지 않음을 전제로 설계된 측면이 강하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만 해도 기존의 지원사업과 예술인 고용보험, 산재보험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며 업무적 혼선과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또한 예술인 복지정책을 공론화하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기관과 갈수록 확대되는 예술인 복지정책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수행할 기관이 필요하다.
둘째, 생태계적 관점에서의 통합적인 정책 설계와 운영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 예술인 고용보험으로 대표되는 예술인 복지정책은 정부의 여러 정책 중 하나일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술정책 영역이 예술 창작과 예술인 지원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술인 지원의 핵심인 예술인 복지정책은 건강하고 창의적인 창작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다. 이를 위해 정부 부처 혹은 사업 관리 주체 중심으로 찢어져 있는 사업과 정책 구조를 통합적으로 연결하고 각 정책의 효능을 극대화할 방안이 필요하다.

예술인 고용보험 시행 1년 성과와 과제’ 웹 세미나 Ⓒ근로복지공단

마지막으로 실효성 있는 예술인 고용보험의 제도화를 위한 협력적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정책 수립 초기, 예술인 고용보험의 관련 당사자가 함께 참여한 TF 운영과 논의 과정은 예술인 고용보험 도입에 중요한 힘이 되었다. 특히 예술인 당사자와 행정 주체, 관련 전문가가 모두 참여해 직업으로서 예술활동이 갖는 특수성을 이해하고 제도 시행에 따른 원칙과 방향을 설계하는 과정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예술 현장에서의 일이란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하며 단순화되지 않는 특별한 형태를 띠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 역시 본격적인 고용보험 지급이 확대되는 시기가 오면 이를 둘러싼 갈등과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고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의 내일을 위해 고용노동부와 문화체육관광부 등 행정 주체 간, 예술인과 행정 주체 간, 예술인 당사자 간의 협력과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장호
하장호(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인복지위원회 위원)

전 예술인소셜유니온 위원장, 현 문화연대 집행위원, 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인복지위원회 위원. 언젠가는 뮤지션이 되겠다는 꿈을 20년째 품고 살고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무대 언저리를 떠나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기획자의 길을 걷다 예술인의 무너진 삶을 직접 경험한 뒤 예술인소셜유니온이란 단체 설립에 참여해 활동했다. 문화운동과 지역 활동, 정책 연구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으며, 최근 호혜적 삶의 가능성을 지역에서 실현할 방법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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