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QUARE

지난호 보기

  • ∙VOL.13 [2024.11]
  • ∙VOL.12 [2024.09]
  • ∙VOL.11 [2024.07]
  • ∙VOL.10 [2024.05]
  • ∙VOL.09 [2024.03]
  • ∙VOL.08 [2024.01]
  • ∙VOL.07 [2023.11]
  • ∙VOL.06 [2023.09]
  • ∙VOL.05 [2023.07]
  • ∙VOL.04 [2023.05]
  • ∙VOL.03 [2023.03]
  • ∙VOL.02 [2023.01]
  • ∙VOL.01 [2022.11]

SQUARE

장애가 제약이 되지 않는 세계
척도를 벗어난 장애예술

예술인이 가진 장애를 관객이 무리 없이 이해하고
장애를 가진 관객의 존재가 모두에게 익숙한 문화,
‘배리어 프리’는 관객과 예술인 모두에게 해당한다.
장애인의 예술 향유와 창작 지원을 위해 마련된 정책이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 잊지 말아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글_김원영(공연예술인, 변호사)
국경과 사회를 가로지르는 다양성의 향연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무용 축제 ‘탄츠메세(Tanzmesse)’에 참여했다. 2020년부터 국내에서 진행한 공연이 초대받은 덕분이다. 이번 탄츠메세에는 공동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 뇌병변 장애를 가진 영국 출신 예술인 댄 도우(Dan dow)가 함께 했고, 내가 참여한 공연 이외에도 서너 팀의 공연에 장애인 무용수1가 있었다. 탄츠메세 전체 출품작 가운데 아마도 가장 큰 호응을 받은 공연은 독일 브레멘 극장(Theatre Bremen) 소속 무용팀 ‘언유주얼 심프톰스(Unusual Symptoms)’와 세계에서 모인 장애인 무용수들이 협업한 〈하모니아(Harmonia)〉일 것이다. 쿠바, 벨기에, 영국, 독일 등에서 모여든 장애인들은 각기 뇌병변 장애와 척수 손상, 상지 절단 장애, 만성 근육 질환 등을 가지고 있었다. ‘언유주얼 심프톰스’ 소속의 비장애인 무용수들 역시 한국인 송영원을 비롯해 여러 인종과 국적으로 이뤄져 있다. 헝가리 출신 안무가 에이드리언 호드(Adrienn Hód)는 브레멘 극장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 다양한 배경과 지리적 조건, 신체적 차이를 가진 사람들을 모았고 2개월 넘는 시간 동안 서로의 몸의 차이를 탐구하고, 각자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작품을 내놓았다. 공연이 끝났을 때 객석의 환호와 박수로 극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언유주얼 심프톰스의 〈하모니아〉

언유주얼 심프톰스의 〈하모니아〉 ⒸTheater Bremen

9월 7일부터는 영국 런던에서 진행된 ‘언리미티드 페스티벌(Unlimited Festival)’에 초대받아 참석했다. 영국은 약 10년 전부터 한국 사회가 장애예술운동과 정책에 관련해 주목한 국가다. 2012년부터 시작한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을 주최하는 영국의 단체 ‘언리미티드(Unlimited)’는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역과 일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의 장애예술인들을 발굴하고 지원해왔다.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이 열리면 이 예술인들은 공연자로 참여하고 서로 간의 작업을 공유하며 소통한다. 올해는 코로나19의 영향 탓인지 축제 규모는 크게 줄었지만, 그간의 작업을 통해 런던은 말하자면 ‘세계 장애예술인들의 수도’가 됐다. 언리미티드 페스티벌 역시 다양한 국적과 인종, 장애, 젠더와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로 북적였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한 사회의 문화와 동시대의 여러 예술적 시도가 응집된 공간에 동등한 주체로 참여하는 모습은 여전히 생경하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2000년대 중반만 떠올려도 대학로의 그 어느 극장도 휠체어가 접근하기 어려웠다. 나는 리허설을 마치고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공연을 준비하는 한 배우의 손에 들려 극장 지하로 내려가 연극을 본 기억이 있다. 장애인 배우들이 출연하는 연극 공연은 관객들에게 외면받았고 무용공연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2022년 우리는 다른 세계를 산다. 공연예술의 중심지 대학로에는 장애가 있는 배우, 무용수, 작가들이 무수히 오가고, 정부와 각 지자체 문화재단들은 앞다퉈 ‘장애예술’, ‘배리어 프리’를 예술정책의 주요 테마로 삼는다.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 기본계획
장애인들이 체계적인 문화예술 교육을 받고 여러 문화공간에서 활동하는데 아직은 어려움이 많다. 그럼에도 지난 10여 년의 변화는 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뒤에는 수십 년 전부터 교육 기회도, 이동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관객도 없이 계단으로 가득한 무대 위에서도 작품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장애인 창작자와 그 협력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 위에서 마침내 장애인들이 국가 문화예술진흥 정책의 진지한 대상으로 정부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2015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설립, 2020년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장애예술인지원법) 제정은 정부가 장애예술을 문화정책의 주요 의제로 삼고 지원하는 바탕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20대 정부의 국정과제로 ‘장애예술 활성화’를 공약했고 청와대 개방 후 상징적인 장소에 장애인 시각예술 작가들의 작품이 첫 번째로 전시됐다. 박근혜,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장애예술 관련 예산은 43억 원(2013)에서 260억 원(2022)으로 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9월 ‘제1차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 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장애예술인지원법 제6조에 근거한 것이다. 발표한 제1차 기본계획은 장애예술인 창작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지금보다 공모사업 규모를 확대하고 맞춤형 레지던시를 추가 조성하며, 장애예술인의 창작물을 국가나 공공기관이 우선 구매하는 제도 등을 추진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장애가 있는 예술인들이 공공이나 민간에 고용돼 작품활동을 하도록 지원하고, 문화예술기관들의 접근성을 증진하겠다고 한다. 장애인 예술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제도를 체계화한다는 등의 내용도 담고 있다. 기본 계획의 주요 내용은 장애예술 현장의 창작자나 관련 단체들이 제기한 여러 목소리를 충실히 담으려 노력한 결과로 보인다. 장애가 있는 창작자들이 여전히 전문적인 예술교육에서 배제돼 있고, 겨우 활동을 이어가도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이 같은 기본 계획은 필요하고 또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 지원이 장애예술인지원법이라는 특정 규범에 근거해 확대될 때 우려되는 지점이 없지 않다.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 기본계획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지원 기본계획 Ⓒ문화체육관광부

규범에서 제외된 장애예술의 가치
장애예술인지원법은 장애인들의 예술활동을 문화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승인하고(제2조), 공공기관의 우선구매제도(제9조의2), 장애예술인 고용지원(제11조), 문화예술 접근성 보장(제12조) 등을 그 내용으로 포함하고 있다. 이 규정들 가운데 구체적인 조항이 마련된 것은 최근 개정된 우선구매제도 정도를 제외하면 없지만, 내용상으로는 일종의 사회서비스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제도를 규율하는 법령은 통상 특수하게 정의된 급여 대상 집단을 상정하고 일정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급여 대상에게 전달하는 목표를 설정한다. 국가의 자원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예술인지원법도 사회서비스 ‘급여대상’으로서 ‘장애예술인’을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장애인등록증을 발급받은 사람 가운데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른 문화예술활동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으로 한정한다. 그러나 영국의 장애예술운동(Disability Art Movement)이 주장하듯 장애예술이란 단지 장애가 있는 사람이 하는 모든 예술활동을 의미하지 않으며, 장애의 개념 또한 한국 장애인복지법의 정의보다 훨씬 넓다.2
장애예술은 단순히 특정한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입은 사람들이 하는 예술활동 일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술 현장에서 신체적, 정신적 차이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주류 문화예술의 흐름이 만들어낸 제도, 관행, 척도를 문제 삼는 일종의 예술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특정한 이념과 지향을 포괄하는 용어다. 영국의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에서 ‘장애인’으로 분류되지 않는 정신적 특질이나 질환이 있는 예술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스스로 ‘장애예술인’이라고 밝힐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물론 이러한 ‘당사자성’에 대한 비판이 있으며, 이 역시 장애예술에 관한 논의 일부다. 이렇듯 장애예술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기존의 척도와 관념을 문제 삼으면서 예술, 탁월성, 전문성 같은 개념은 물론이고 ‘장애’ 그 자체를 논쟁과 창작활동의 탐구 대상으로 가져오는 실천의 역사 속에서 형성됐다. 한정된 대상에 일정한 서비스를 전달하는 것을 주요 내용을 하는 법규범과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기본 계획이 이 맥락과 의미를 포괄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지자체와 지역 문화재단, 극장, 전시장 등이 장애예술에 관한 급진적이고 폭넓은 의미를 공유하고 실험하지 못한 채 중앙정부가 기본 계획에 근거해 하달한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다소 답답하다.
장애예술인에게 법이 규정한 ‘사회 서비스’를 누가 어떻게 전달할지는 아직 구체화돼 있지 않다. 이에 지난 9월 27일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을 법적 지위를 가진 전문 기구로 만들고, 기본계획이 제시한 정책을 총괄하도록 하는 ‘장애예술인지원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나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을 안정적이고 독립적인 법정 기구로 만드는 데 동의한다. 다만 기본 계획이 설계한 주요 사업들을 모두 맡아서는 안 된다. 기본 계획의 과제 상당수는 장애인고용공단, 예술인복지재단 등 기존의 예술, 장애인 관련 기관들이 책임 있게 분담해서 수행해야 한다. 예술인복지재단은 장애인 창작자들이 직면한 고유한 어려움에 그간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가? 모든 정부기관은 업무 범위에 언제나 장애가 있는 국민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효율적인 정책 집행을 위해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게 역할을 집중시킨다면, 그리고 그 역할이 주로 사회 보장 정책의 집행자로서 성격을 가진다면,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은 고용노동부나 보건복지부 역할 일부를 그대로 건네받아 수행하는 사회 보장 전달 체계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 장애예술인에게는 중앙에서 개인으로 이어지는 효과적인 서비스 체계보다는 국가와 관료 체계에 온전히 포섭되지 않고서 장애예술운동을 뒷받침하며, 각 지역의 문화예술 기관, 창작자와 수평적으로 협력하는 지원 기구가 더 필요하다. 영국문화원과 언리미티드가 협력을 통해 세계의 장애예술인들을 길러낸 경험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예술인들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예술인들 Ⓒweareunlimited

기존의 관념을 뛰어넘는 제도를 희망하며
〈하모니아〉를 만든 헝가리 출신 안무가 에이드리언 호드는 이전까지 장애인 무용수들과 작업한 경험이 없었다고 한다. 브레멘 극장 소속의 다른 비장애인 무용수들 역시 그랬다. 그럼에 브레멘 극장이 많은 시간과 비용을 기꺼이 투자해 전 세계의 장애인 창작자들을 모집하고 오디션을 거쳐 선발한 후, 각자의 움직임과 몸을 이해하며 서로의 몸에 조응하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마침내 이 작품은 놀라운 성취에 도달했다. 이는 장애인 전문예술 교육자가 장애인 무용수에 대한 고용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장애를 비롯해 국적, 인종, 젠더, 성적 지향 등 다양성에 열린 태도, 종래의 관료적인 규범과 체계로부터의 자율성, 사회적 소수자가 지닌 예술적 잠재성에 대한 신뢰가 좋은 작품을 낳는다. 나는 이번 정부가 세운 기본 계획을 잘 이행함으로써 장애인 창작자들이 안정적인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주길 기대한다. 다만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유력 정치인들은 장애인들이 참가한 예술 행사장에서 너무 긴 인사말을 하거나, 거창한 공식 행사를 열어 장애예술인의 위대한 후견자로서 나서기보다는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어떨까? (브레멘 시장이나 극단장은 〈하모니아〉 공연 전후에 인사말을 하거나 장애인 무용수와 사진을 찍지 않는다.) 지역의 문화재단, 극장, 전시관은 기본계획의 과제를 수행하는 기구에 머물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어딘가에서 기회를 기다리는 장애가 있는 예술인을 적극적으로 발굴해보면 어떨까? (그들은 ‘복지카드’가 없으므로 장애예술인이 아니지만, 그들이야말로 한국의 예술 담론과 실천을 질적으로 증폭시켜줄 행위자가 아닐까?) ‘배리어 프리’를 연구하기 위해 극장의 계단을 살펴보는 데 그치지 않고 미술작품을 시각장애인에게 전달하는 언어를 발명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어떨까? 예술고등학교, 예술대학교와 협업해 장애예술인을 위한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 학교에 장애인 학생이 당당히 입학하고, 비장애인 학생과 동등하게 배우는 기회를 확대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종래의 전통, 척도, 주류적 가치를 끊임없이 문제 삼으며 마침내 장애라는 ‘결핍’의 경험을 창작으로 연결 짓는 데 성공했던 이 예술운동의 가치를 지속하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1) 장애인 무용수가 참가한 공연의 수를 정확히 헤아리지는 못한다. ‘장애가 있는 몸’임을 가시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그램북에 올라온 사진을 통해 장애인 무용수가 참여한 공연의 수를 짐작할 뿐이다. 실제로도 누가 ‘장애인 무용수’인가를 정의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2)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의 개막식에서 총괄 프로듀서 조 베런트(Joe Verrent)은 “영국 인구의 22% 장애인들이 모두 세상으로 나올 때까지 우리 활동은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2019년 기준 인구의 1/5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영국통계청의 발표와도 유사하다. 반면 한국의 보건복지부가 2022년 4월 발표한 공식적인 장애인 등록인구수는 260만 명이 조금 넘으며 인구 대비 5% 수준이다.
김원영
김원영(공연예술인, 변호사)

연극과 무용작업에 참여한다. 〈사랑 및 우정에서의 차별금지법〉, 〈인정투쟁; 예술가편〉, 〈무용수-되기〉 등의 공연에 출연했다. 법무법인 덕수에 소속된 변호사이기도 하다. 장애, 법·규범, 몸, 예술의 관계를 연구하고 글을 쓰며, 작품활동을 한다. 지은 책으로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이보그가 되다』 등이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