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2023년 12월 28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는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문화예술 현장의 관심을 받았다. 첫째, 주요 정책사업이 당장 통합되거나 폐지될 것인가에 대한 측면에서다. 이미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다수 기관이 2024년 사업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개별 사업의 통합 혹은 폐지의 과정을 겪은 터라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는 변화의 내용이 무엇일지, 특히 추가적인 사업 통합과 폐지 논의가 포함되어 있을지 등은 현장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향후 제20대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의 방향, 목표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제20대 대통력직인수위원회 시절에 발표한 ‘국민께 드리는 20개의 약속’에서 “문화공영으로 행복한 국민, 품격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라고 약속한 바 있다. 이후 정부 출범 3년 차를 앞두고 새롭게 취임한 장관이 제시하는 문화예술정책이므로 향후 정책, 예산, 사업의 방향성이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현장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중 하나로 제시된 ‘문화예술 정책구조의 혁신’과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제20대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을 점검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문화예술 정책구조의 혁신’은,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라는 비전하에 제시된 두 개의 목표인 ‘국격에 맞는 세계적 수준의 예술인·단체 육성’과 ‘국민 누구나, 전국 어디에서나 마음껏 누리는 문화예술’을 추진하기 위한 3개의 전략 중 하나다. ‘예술인 지원의 혁신’과 ‘국민의 문화향유 환경 혁신’이라는 혁신전략이 두 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문화예술정책의 혁신전략으로 제시된 것이라면, ‘문화예술 정책구조의 혁신’은 이를 수행하기 위한 행정, 구조의 혁신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예술 정책구조의 혁신’에 대해 분석하는 작업도 전체 비전과 목표로 제시된 내용의 맥락을 파악하면서 이뤄져야만 한다. 지금부터 하나씩 확인하고 점검해 보자.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 Ⓒ문화체육관광부
엘리트주의와 국가주의
공급과 향유의 이분법
공급과 향유의 이분법
혁신전략을 논의하기에 앞서 비전과 목표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 보자. ‘국격에 맞는 세계적 수준의 예술인·단체 육성’과 ‘국민 누구나, 전국 어디에서나 마음껏 누리는 문화예술’이라는 두 가지 목표와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라는 비전의 설정에는 아무리 봐도 큰 공백이 있다.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는 엘리트주의와 국가주의에 경도된 전략이자 공급과 향유 (혹은 생산과 소비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이에 커다란 공백이 드러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중복된 사업을 정리하고 기관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것은 언제라도 필요한 일이고 세부과제 중 일부는 그동안 문화예술 현장에서도 지속적으로 필요성이 제기되어 온 내용이라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라는 비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국가의 문화예술정책을 ‘엘리트 예술창작지원’과 ‘수동적 향유자(소비자)로서 국민 문화활동 지원’으로 나누어 제시한 측면에서는 기대보다 우려가 더 클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 Ⓒ문화체육관광부
그뿐만 아니라 최근 십여 년 동안 문화예술정책의 지평을 확장해 준 주제[지역문화(분권), 거버넌스, 생활문화, 문화다양성 등]나 새롭고 강하게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주제(기후위기, 지속가능성 등)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거나 다른 맥락으로 재조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빈자리에 들어온 것이 바로 ‘대표 작가, 해외 진출, 대표 예술단체, 대표 축제, 브랜드화‘ 등의 개념이다. 결국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는 입체적・수평적으로 확장되고 있던 (혹은 확장돼야 할) 문화예술정책을 평평하게 만들고 수직으로 재배열하면서 기관과 사업 간의 칸막이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크다.
역대 정부의 문화정책 기조 중에서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의 기조와 가장 비슷한 기조를 지녔던 적이 있었다. 바로 “품격 있는 문화국가 대한민국”을 비전으로 제시한 제17대 이명박 정부 때였다. 제17대 정부는 특히 정책구조 및 행정과 관련하여 소액 다건 방식의 지원이 아닌 ‘선택과 집중의 지원체계’, 중앙 기구의 역할을 재편하는 ‘실용과 효율의 문화행정’을 강조했다. 이는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의 정책구조 혁신 내용과 상당 부분 유사한 내용으로, 당시와 많은 부분이 변화된 현재의 문화환경에 맞는 정책적 방향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십 수 년 전의 비전과 전략으로 단순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문화예술 지원사업 혁신
문화예술 사업·축제를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문화예술 사업·축제를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문화예술 정책구조의 혁신’은 ‘사업·축제 대표 브랜드로 전면 재구조화’와 ‘문화예술 지원체계 개편’이라는 핵심과제 2개와 세부과제 5개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예술 정책구조 혁신’의 핵심과제와 세부과제 Ⓒ문화체육관광부
핵심과제인 ‘사업·축제 대표 브랜드로 전면 재구조화’를 위한 세부과제로는 ‘문화예술 지원사업 전면 재구조화’와 ‘한국 대표 브랜드 축제 지원’이 제시되어 있고 각각 구체적인 재구조화 방안과 연계 방안 계획이 발표되었다.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 위해 순수예술 지원 늘리고, 청년·지역 문화반경 넓힌다(2023.12.28.) Ⓒ문화체육관광부
앞서 언급한 대로 유사·중복 사업에 대한 정리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행정의 효율성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한정된 예산으로 문화예술의 진흥을 꾀하기 위해서도 꼼꼼하게 확인해야 할 일이다. 다만 몇 가지 측면에서는 확인하고 점검해야 할 내용이 있다고 본다. 우선 문화예술의 장르별 특성에 대한 부분이다. 문화예술은 장르가 다양하고, 각각의 장르는 창작 환경이나 향유를 둘러싼 조건 등이 천차만별이다. ‘유통’과 ‘국제교류’를 중심으로 각 기관의 사업을 통합하여 운영한다고 했을 때,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는 기조가 유지된다면) 자칫 특정 장르를 중심으로 운영되거나 반대로 특정 장르에 대한 세심한 지원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특정 행사 및 장르에 쏠림현상이 나타날 우려, 작은 규모의 지원에 힘입어 유지되던 축제나 사업이나 예술 활동이 위축될 우려를 불식하는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원사업을 재구조화하면서 통합했을 때, 통합된 사업을 운영하는 기관에 인력을 확충해 주는 지원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상식적인 이야기인데도 다시 언급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동안 사업의 이전과 통합만 고려하고 이를 운영하는 조직과 인력의 재구조화가 병행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직과 인력의 재구조화 없이는 사업 통합의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운영 구조에 대한 지원과 강화를 통해 ‘유사·중복 사업의 정리’를 유통・향유・국제교류와 관련된 문화예술 지원체계의 전문성과 효과성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문화예술 현장의 혼란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문화예술 현장을 지원하던 사업의 내용・방식・규모가 한꺼번에 달라진다면 현장에서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아도 지원사업 참여의 조건, 심의, 정산 등의 과정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큰 상황이므로 대폭적인 사업의 변화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이해는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예술 지원체계 개편
지원기관 역할 재정립 및 기능 일원화
지원기관 역할 재정립 및 기능 일원화
두 번째 핵심과제인 ‘문화예술 지원체계 개편’을 위한 세부과제로는 ‘문화예술 지원기관 역할 재정립’, ‘유통·향유·국제교류 기능 일원화’, ‘국립문화예술시설 관리기관 설립’이 제시되었고 세부과제별 방안과 계획도 발표되었다.
우선 ‘문화예술 지원기관 역할 재정립’과 ‘유통·향유·국제교류 기능 일원화’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문화정책 전달 체계로서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및 지역문화재단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수준에서 연구가 이뤄졌다. 특히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사업의 집행을 담당하는 역할을 넘어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유관 기관의 전국적 협력을 활성화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으므로 역할 재정립에 대한 논의는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지역의 상황이 균일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지역 문화 분권과 자치를 고려해 역할을 재정립하는 고민(연구)이 추가적으로 필요해 보인다.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 위해 순수예술 지원 늘리고, 청년·지역 문화반경 넓힌다(2023.12.28.) Ⓒ문화체육관광부
다음으로 ‘유통과 향유, 국제교류를 통합 지원하는 문화예술 대표기관의 육성을 추진하겠다’는 제안이 예술경영지원센터와 지역문화진흥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등의 기관을 통합하겠다는 의미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업무 일원화 이후에 일정 기간을 거쳐 기관을 통합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면 연구를 통해 필요성과 효과성을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다. ‘행정력을 갖춘 대표 공공기관이 필요하다’는 식의 접근보다는 유통・향유・국제교류와 관련된 전문성을 발휘하고 문화예술 현장에 적합한 지원을 좀 더 원활하게 담당할 수 있는 기관체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 위해 순수예술 지원 늘리고, 청년·지역 문화반경 넓힌다(2023.12.28.)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 지원체계 개편’과 관련하여 가장 강조된 것은 (가칭)‘문화예술복합관리센터’의 설립에 대한 내용이다. 이는 당인리문화창작발전소(2025년 개관), 국립공연예술센터(2028년 개관) 등 신설되는 국립문화예술시설을 포함하여 기존의 소마미술관·조각공원, 아르코미술관, 아르코예술극장 등을 포함한 종합관리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런데 문화예술복합관리센터가 종합관리를 하겠다는 시설의 범위나 관리의 영역, 곧 시설, 운영, 프로그램 등을 모두 포함하는지 등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해 보인다. 각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기관이 이미 존재하는데 문화예술복합관리센터는 무엇을 종합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무엇을 바꾸는지보다
어떻게 바꿔나가는지가 중요하다
어떻게 바꿔나가는지가 중요하다
올해 예산의 97%가 삭감된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이하 한문연)의 사례는 ‘혁신’의 내용만큼이나 과정과 방법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유인촌 장관은 “한문연은 옛날처럼 친목단체로 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1996년 설립되었고, 2012년 8월 「문화예술진흥법」 제38조에 근거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유관 기관으로 전환한 한문연은 하루아침에 경상비 전액과 사업예산의 97%가 삭감되었다. 한문연은 입장 발표를 통해 ‘그동안 한문연이 고유사업을 키우지 못하고 위탁사업에 매몰되었던 점을 반성한다’고 했지만 ‘사업의 통폐합과 관련해 협의와 이관 시간을 줬으면 충격이 덜했을 것 같다’며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혁신과 변화는 ‘단절’이 아니라 ‘끌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무엇을 바꾸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바꾸는가도 중요하다. 문화예술 지원기관의 역할 재정립, 유사·중복 사업에 대한 정리, 지원체계 개편 등은 문화예술 현장의 꾸준한 요구였다. 그런데 이를 풀어가는 방식, 혁신과 변화를 끌어가는 과정이 매우 우려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간담회(15회), 현장 방문(13회), 현장 의견 수렴(46회) 등을 충분히 거쳤다고 했지만 정작 문화체육관광부의 유관 기관인 한문연은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소통의 영역, 관계의 영역, 정치의 영역에서 훨씬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 문화예술의 현장은 “최고의 예술, 모두의 문화”라는 이분법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다양한 가치, 곧 지속가능성, 다양성, 공공성 등과 지역·현장에서의 실천적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버넌스, 지역 분권, 기후위기 대응 등도 거스를 수 없는 동시대 문화예술정책의 과제다. ‘문화예술 3대 혁신전략, 10대 핵심과제’는 그런 면에서 공백이 너무 크다. 문화예술 현장을 기반으로 한 의견 수렴과 논의를 통해 문화예술정책의 비전과 목표, 과제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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