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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의 명과 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10대 장면

1973년 10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란 이름으로
출범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훌륭한 예술이
우리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문화예술의 힘을 전 분야에 확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지난 50년의 세월 중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억해야 할 10가지 장면을 톺아본다.
글_양경학(숙명여자대학교 객원교수)
사람 나이 50세를 ‘지천명(知天明)’이라고 부른다. 이는 ‘타고난 운명을 아는 나이’라는 뜻으로 50세는 자신이 이 땅에 왜 왔는지,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하고 모색하는 나이다. 인생에 몇 번의 전환점이 있기 마련이듯 조직이나 기관도 마찬가지다. 1973년 10월 11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하 문예진흥원)이란 이름으로 출범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는 문화예술의 가치를 전 분야에 확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50년 역사 속에 지금의 예술위가 있기까지는 적지 않은 전환점이 있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 H. Carr)는 “역사란 단순히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있었던 사건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현재와 미래에 어떠한 길을 제시해줄 수 있는가를 찾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예술위의 50년 역사를 톺아보고자 하는 뜻도 다르지 않다. 성과와 결실,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예술위의 지난날 중 10가지 장면을 통해 앞으로 예술위가 나가야 할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문화예술 발전의 힘찬 도약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개원 (1973. 10. 11)
1950년대 우리나라는 6∙25 전쟁으로 해방 이후 힘겹게 일궈왔던 생활의 터전과 사회·경제적 체제의 기반이 완전히 붕괴해 절대 빈곤에 시달렸다. 하루 세 끼 식사조차 힘들어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허기를 채웠다. 이 시기의 문화정책은 정부 스스로 ‘무위방임시기(無爲放任時期)’라고 표현하고 있듯 문화정책에 투입할 자원은 고사하고 정책적 관심조차 없던 시기였다. 1960년대는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1962년부터 제1~2차 경제개발계획을 성공리에 진행하며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여전히 빈약한 국가재정, 문화행정에 대한 경험과 전문지식의 부족, 경제 제일주의적 발전전략에 따른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 등으로 문화예술 진흥에 필요한 실질적인 투자는 이뤄지지 못했다.
곽종원 문예진흥원 초대 원장 취임 인터뷰

곽종원 문예진흥원 초대 원장 취임 인터뷰(1973.4.2 동아일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40년사

반면 제4공화국이 시작된 1972년은 우리나라 정치사나 문화정책사에서 있어 기념비적인 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장기독재로 시작된 유신 헌법이 통과된 해이고, 문화적으로는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실질적인 시작이자 문화진흥 정책의 모법으로 일컬어지는 문화예술진흥법(이하 문예진흥법)이 제정된 해이다. 문예진흥원은 문예진흥법 제6조(한국문화예술진흥원) 제1항에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하게 하기 위하여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설립한다”, 제3항에 “진흥원의 설립∙운영에 필요한 자금과 사업이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진흥원에 문화예술진흥기금을 설치∙운영한다”라는 규정에 근거해 이듬해인 1973년 10월 설립됐으며, 기관 운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재원 확보와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당시 법에 규정된 설립목적은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의 지원이었다. 문예진흥원의 설립은 정부가 단순히 문화예술 지원기관 하나를 더 추가했다는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흔히 1972년을 ‘문화정책의 원년(元年)’이라고 부른다. 그전까지 정부의 문화정책은 국립예술단체 지원, 계몽사업 지원, 관변단체 지원, 문화재 보존과 보호 중심의 지원 등 최소한에 머물렀다. 그러나 1972년 8월 각종 문예진흥 정책의 모법인 문예진흥법이 제정된 후 문화예술진흥기금(이하 문예진흥기금)이 설치되고 지원기관으로 문예진흥원이 설립됨으로써 문화정책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창작과 향수, 매개 등 3대 지원 정책의 시행이 가능한 환경과 시스템이 구축됐다. 이후 문예진흥 재원으로서 영화관, 공연장, 박물관, 미술관, 문화재(능, 사적지 등) 입장료에 부가해 문예진흥기금의 모금이 시작되고, 문화예술활동 수입 및 문예진흥원에 대한 면세, 문예진흥 기부금에 대한 조세를 감면해 민간 부문의 문화예술 투자를 유도했다. 또한 강제 규정은 아니지만 건축물 건축 시 미술 장식 권장의 근거가 마련됐으며, 10월 문화의 달 및 문화의 날이 각각 제정돼 우리나라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힘찬 도약이 시작됐다.
2. 문화 부문에 설치된 최초의 공공기금
문화예술진흥기금 설치(1972. 8. 14)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1972년 8월 문예진흥법 제6조 3항에 따라 문예진흥기금이 설치됐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문화 부문에 만들어진 최초의 공공기금으로 문화정책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문예진흥기금의 설치는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하다. 기금은 국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자금을 신축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을 때 한해 법률로 설치되는 특정 자금을 말한다. 기금은 세입세출 예산에 의하지 않고 운용될 수 있으며, 예산 원칙의 일반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좀 더 탄력적으로 재정을 운용할 수 있어 정책적으로 필요한 다양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재원이 마련된다는데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둘째, 문예진흥기금의 설치는 그동안 공적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각종 문화예술 사업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기초재원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예술계 차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물론 기금 모금 대상처에 공연장이 포함돼 입장료 중 일부를 기금으로 출연하는 불편함이 없지 않으나, 점차 기금조성 재원도 모금 이외에 이자 수입, 기관 운영 수입, 정부 출연금, 공익 자금, 기부금 등으로 다양해지면서 모금으로 발생하는 부담보다는 기금 수혜 혜택이 더 커져 문예진흥기금은 예술계의 가장 중요한 지원 자금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서울소재 극단의 지방순회공연 지원 (1974.11.27 경향신문)

서울소재 극단의 지방순회공연 지원 1(1974.11.27 경향신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40년사

셋째, 문예진흥기금의 설치는 기관 차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문예진흥원은 재단법인으로 설립됐다. 일정한 목적을 위해 결합한 사람들의 단체인 사단법인과는 달리 재단법인은 특정한 목적에 바쳐진 재산으로 이뤄진 단체를 말한다. 그래서 문예진흥법에도 이 법에 규정한 것 외에는 민법의 재단법인에 관한 사항을 준용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래서 이전 문예진흥원은 영문 명칭으로 ‘The Korean Culture and Arts Foundation’을 사용했는데, ‘재단(財團)’을 뜻하는 foundation이 영문 명칭에 들어간 이유이기도 하다. 이 영문 명칭은 외국과의 국제 교류에 있어 긍정적으로 작용했는데 외국에서 foundation이란 단어는 흔히 쓸 수 있는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튼튼한 재정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기관 명칭에 마음대로 사용 없는 말이기에 외국과의 교류에서 신뢰를 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법인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그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관 관청에 설립 허가를 받는 일이다. 설립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법인의 재산 목록, 사업 계획 및 수지예산 서류, 임원 취임 예정자 인적사항 등 많은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재정적 기초의 확보 가능성’이다. 즉 법인 운영 재정에 문제가 없는가를 따지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단체가 아무리 좋은 사업 계획을 구상하고 있더라도 재정적 기반이 취약하면 법인격을 가진 단체로는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예술단체가 이런 면에서 산업이나 경제, 사회 등 다른 영역에 비해 취약한 탓에 대부분 법인 형태로 운영되지 않고 임의단체로 운영되고 있다. 1973년 6월 정부로부터 문예진흥기금 모금 허가 승인을 완료한 후, 그해 전국 영화관∙공연장 대상으로 모금이 시작됐다. 이후 고궁(1975), 박물관(1976), 능∙사적지, 미술관(1983) 등으로 점차 모금 대상처를 확대했다. 문예진흥기금 모금은 부담금관리기본법에 의해 2003년 12월 31일 폐지될 때까지 30년간 이뤄졌다. 그동안 총 4조 1천 8백여억 원을 조성해 우리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각종 창작-향수-매개 지원사업에 가장 중요한 재원이 됐다.
3. 창작과 향수를 위한 하드웨어 구축
주요 문화예술진흥 기반시설 개관(1979~2009)
문예진흥원은 1973년 개원 이후 문화예술 창작 및 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문화예술 발전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공연장, 전시장, 자료관, 연수시설 등 다양한 문예진흥 기반시설 등을 건립 운영해왔다. 저렴한 대관료와 자체 기획사업, 자료 수집과 조사 사업, 무대예술 전문인력 양성을 통해 예술계를 간접 지원하고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 운영하는 공간들이다. 문화시설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경제 발전을 통해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 개인 소득이 증가하지 않는 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문화시설 건립이 국가적 차원에서 제대로 추진되기는 쉽지 않다. 제3공화국 박정희 정권 때 1966~1968년 3개년 계획으로 서울시 용산구 응봉공원 약 66만 ㎡ (20만 평) 대지에 10개 시설로 구성된 6만 ㎡(2만 평) 규모의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계획’이 의욕적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국립극장 등 일부 시설만 건립됐는데 그 이유는 사업 재원 부족에 기인했다.
문예진흥원이 설립된 1970년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리에 진행되며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 후진국에서 벗어나지 못해 재원이 필요한 하드웨어 건설에는 국가 예산을 투자할 여력이 부족했다. 당시의 공연장과 전시장 등 문화공간의 실태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종합문화예술회관 기공식

종합문화예술회기공식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40년사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을 둘러싸고 건립된 미술회관(1979)과 문예회관(1981)이 건립됐다. 두 시설의 개관은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발전에 있어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창작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예술인들에게 창작∙발표 공간을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했고, 시민에게는 수준 높은 전시∙공연 프로그램 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즐길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1992년 무대연수회관이 건립되면서 문화행정과 예술경영 관련 연수 및 워크숍, 무대디자인∙조명∙음향 등 무대예술 분야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장∙단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특히 무대예술 분야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은 국내 유일한 무대 스태프 양성 프로그램으로 우리 공연예술 발전과 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1979년 미술회관 3층에 개관한 예술자료관은 1993년 예술의전당 자료관을 흡수∙통합하면 예술의전당 내 공간으로 확장 이전해 재개관했다. 1995년에는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이탈리아 베니스에 전용관을 건립∙운영하면서 기관의 업무 영역이 외국으로 확장됐다.
4. 업무 분리에 따른 역할 축소
문화발전연구소 분리 독립 (1994. 7. 1)
기관 운영에 있어 연구기능은 새로운 사업을 개발하고 기능과 역할을 개척하며, 기관의 경쟁력 강화 및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기관의 혁신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1987년 2월 25일 문화발전연구소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소식을 열고 국민 문화 통계조사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문화의 전 영역에 대한 잠재력과 문화발전의 정책지표가 되는 기초통계 조사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 문화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중장기 문화정책 개발, 예술행정에 대한 해외의 문화정책 자료 수집∙발간 등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축적했다.
특히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공동으로 매년 실시하고 있는 ‘국민문화예술활동조사’도 그 시작은 1988년 ‘문화예술 수용 및 향수능력실태조사’와 1991년 통계청이 승인한 ‘문화향수실태조사’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던 문화발전연구소는 1994년 7월 1일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한국문화정책개발원(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으로 분리 독립함으로써 연구소가 추진하던 문화정책연구, 조사연구사업, 해외 문화정책 연구, 문화통계조사, 북한문화예술연구 등 모든 업무를 이관했다. 연구소의 분리 독립은 단순한 기능 이전을 넘어 예술위의 기능 중 새로운 지식과 이론을 개발하고 우리 문화발전을 위한 중장기 문제를 해결하는 영역은 줄어들고 문예진흥기금을 통한 단순 지원 중심기관으로 그 역할이 축소됨을 의미한다.
이후 조직 차원의 분리 독립은 아니더라도 개원 이래 문예진흥원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추진하던 한국 문학 번역∙출판사업도 1996년 한국문학번역원으로 업무가 이관됐다. 또 기능과 역할을 일정 부분 담당하던 예술교육과 예술경영은 각각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예술경영지원센터로, 지역문화는 지역문화진흥원, 예술인복지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장애인문화예술지원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등으로 별도 기관을 설립해 전담하게 됨으로써 문예진흥원이 담당하는 영역은 축소되고 그 위상도 문예기금을 통한 지원기관으로 급격히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5. 안정적인 사업 추진의 동력
문화예술진흥기금 적립금 5천억 원 달성(2003)
문예진흥법에 근거를 두고 설립된 문예진흥원은 문예진흥기금을 조성하고 운영하며, 조성된 기금을 통해 각종 문예진흥사업을 지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따라서 1973년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시작된 후, 기금 5천억 원 조성목표를 수립해 매년 문예진흥기금사업 예산과는 별도로 적립금 예산을 세출 편성하고 지속해서 기금을 축적해왔다. 창립 30주년이 되던 해인 2003년 마침내 누적 기금이 5,058억 원에 달함으로써 적립금 5천억 원 조성목표를 달성했다. 문예진흥기금 5천억 원 조성목표는 당시 경제 상황을 고려해 세워졌다. 평균 10%대의 시중 이자율을 감안해 적립금 5천억 원을 조성하면 원금을 쓰지 않고도 매년 5백억 원 이자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당해연도 조성되는 모금액 5백억 원, 다른 재원들을 합해 1천억 원 넘는 규모의 문예진흥 자금을 확보해 안정적으로 문예진흥기금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기금 적립금은 2004년 5,273억 원으로 정점에 이른 후 기금의 주요 조성 재원이었던 영화관, 공연장, 박물관, 미술관 등의 입장료에 일정액을 부과하던 기금 모금이 2003년 말 폐지되면서 이렇다 할 재정 확충 없이 부족한 사업비를 기금 적립금에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기금 적립금 잔액은 2017년 5백억 원대까지 줄어들었고, 중단됐던 정부 출연이 재개된 후에야 그 규모가 다소 회복됐다. 하지만 여전히 5천억 원에는 훨씬 못 미치는 1천억 원대에 머무는 실정이다. 물론 최근 예술위 세출예산이 4천억 원을 넘게 지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출예산 1천억 원을 예상하고 수립된 기금 적립금 5천억 원 조성목표는 현재 시점에서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또한 당시 세출예산 증액보다는 적립을 우선하는 문예진흥원의 정책기조 때문에 지원사업비는 증액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현상 유지됐기에 예술계의 불만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기금 적립금 5천억 원 조성목표의 현실성과 효용성 측면만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30년 동안 세출예산을 절약하고 한 푼이라도 더 기금을 모금하고 자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혼연일체로 노력한 모든 구성원의 땀과 노력, 절실함에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둬야 한다.
6.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위기의 시작
문화예술진흥기금 모금제도 폐지와 타 기금 전입
2000년 12월 기획예산위원회(현 기획재정부)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어려워진 경제 상황을 고려해 경제단체 등의 건의와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기업활동과 국민 생활에 부담이 되는 준조세 정비방침을 확정∙발표했다. 당시 준조세 정비방침은 3가지 방향으로 추진됐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업과 국민에 부과하는 11개 부담금을 폐지 또는 개선하고 둘째, 부담금 신설 방지와 징수·관리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부담금관리기본법을 새로 제정하며, 셋째 기업의 비자발적 기부금·성금 부담 경감 등이다. 1973년 이래 문예진흥 재원으로 조성∙활용되던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바로 이 준조세 정비 방침에 따라 폐지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이때 폐지된 부담금은 문예진흥기금 모금을 포함해 개발부담금(수도권 이외 지역), 국제교류기여금, 교통안전분담금, 도로교통안전관리기금부담금, 진폐사업주부담금 등 6개였다. 당초 모금 폐지 시기를 2004년 말 또는 기금 4,500억 원 조성 시(현 기금적립액 3,663억 원)로 결정했으나 2004년 말에서 1년 앞당겨져 2003년 말에 폐지됐다. 부담금관리기본법 제3조(부담금 설치의 제한)에서 규정하는 설치 가능한 부담금에서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제외됐기 때문이다.
모금 제도 폐지와 관련해 일반 국민과 예술계에 잘못 알려진 사실 한 가지가 있다.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위헌 판정을 받으면서 폐지됐다는 내용이다. 문예진흥기금 모금 제도가 위헌 제청된 것은 맞다. 그러나 위헌 제청 내용은 모금 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다른 내용이었다. 2003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심판 중인 모 공연기획사의 업무상 횡령 재판과 관련해 서울지방법원에서 당시 문예진흥법에 규정된 “모금의 모금액, 모금대행기관의 지정, 모금수수료, 모금방법 및 관련자료 기타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라는 내용이 법률이 아닌 시행령(대통령령)에 위임한 헌법 제75조 포괄위임입법금지의 원칙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판시해달라는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2003년 12월 18일 심판 대상 문예진흥법 조항들은 헌법에서 규정한 포괄위임입법금지의 원칙에 위배돼 위헌이라고 판정했다. 이듬해인 2004년 1월 1일부터 모금이 폐지돼 헌재의 판시 결과는 사실상 큰 의미가 없었고 만일 모금이 폐지되지 않고 존속했더라도 모금액이나 모금방법 등 세부내용을 대통령령(시행령)에 위임했던 것을 법 개정을 통해 문예진흥법에 적시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만약 모금제도 자체가 위헌 판정을 받았다면 2007년부터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관 입장료에 포함해 3%씩 징수하고 있는 영화발전기금도 폐지된 문예진흥기금의 영화관 모금방식과 동일한 징수방법이기 때문에 당연히 위헌 판정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발전기금은 아무 문제 없이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문예진흥기금 모금폐지와 관련해 일반에 잘못 알려진 이런 사실은 당연히 바로 잡혀야 할 것이다.
문예진흥기금의 조성 재원 중 가장 중요한 재원은 바로 모금이다. 모금 대상처는 1973년 전국 영화관, 공연장을 시작으로 고궁, 박물관, 능∙사적지, 미술관 등으로 확대됐고 모금은 이들 시설 입장료에 포함해 징수하는 방식이었는데 매년 2~6.5% 범위에서 문체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진행됐다. 모금 대상처 중 절대비중을 차지하던 곳은 영화관이었고, 특히 서울에 소재한 극장들이었다. 모금제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가장 컸던 곳도 영화관과 공연장 운영주들이었다. 2003년 말 문예진흥기금 모금 폐지로 당장 연간 5백억 원 이상 조성되던 모금액이 하루아침에 허공으로 사라진 상황에서 이를 대체할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시 정부는 기금모금 폐지로 인해 부족한 재원을 국고에서 지원한다고 공언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문예진흥원은 대안으로 정부 출연의 지속, 방송발전기금 출연의 지속, 민간기부금 적극 유치, 인터넷 사이버 복권, 사적 복제보상 부가금, 광고사업 등 다양한 수익사업의 개발 등 여러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문예진흥원과 문체부는 신규 발행하는 로또복권의 수익금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판단해 동 수익금이 지원될 수 있도록 타 정부부처, 국회 등을 대상으로 지원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대대적인 입법청원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2004년 4월 복권및복권기금법이 신규 제정되면서 제23조에 로또복권 수익금 사용 용도로 ‘문화예술진흥 및 문화유산보존’ 문구가 포함됨으로써 2004년부터 문예진흥기금에 복권기금이 전입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복권기금 문화나눔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복권 수익금 배분은 이미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선진국에서도 이뤄진 사례가 있어 우리나라에 도입하는 데 큰 도움을 됐다. 문예진흥기금 모금 대체 재원으로 2004년부터 다행히 4백억 원 넘는 큰 금액의 복권기금 수익금이 전입되기 시작했으나, 로또복권 판매를 통해 조성되는 복권기금인 만큼 수익금도 사회 취약계층이나 문화 소외지역을 위한 사업에 사용돼야 했고 매년 복권위원회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심사받아야 하는 등 이전 모금액을 활용해 자체적으로 예산을 편성하던 과거에 비해 많은 제약이 따랐다.
앞서 ‘문예진흥기금 적립금 5천억 원 달성’에서도 살펴봤지만, 적립금을 헐어 쓰기 시작한 때도 바로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폐지돼 재정 사정이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동안 1973년 개원 이래 추진된 문예진흥기금사업은 창작과 향수, 매개 등 3개 부문을 축으로 관련 사업들을 지원해왔는데, 그중 가장 많은 예산이 편성된 부문은 당연히 창작 부문이었다. 그런데 2004년부터 4백억 원 넘는 막대한 금액이 복권기금으로 전입되면서 그 예산이 거의 향수 부문에 편성되다 보니 2004년 개원 이래 처음으로 향수 부문이 창작 부문 예산을 엄청난 금액 차이로 역전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2004년 부문별 예산액을 살펴보면 예술창조역량강화 163억 원, 국제교류 22억 원, 문화향수 504억 원, 예술보존계승 62억 원으로, 이를 창작-향수-매개 부문으로 재편하면 창작 185억 원, 향수 504억 원, 매개 62억 원으로 창작과 향수 부문 예산의 현격한 차이가 드러난다. 결국 2005년 독임제에서 합의제로 전환하며 새로 출범한 1기 위원회는 현격한 차이가 나던 향수와 창작 예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마땅한 재원이 없자 개원 이래 적립만 해오던 기금 적립금을 헐어 쓰는 결정을 내렸고, 그 추세는 이후에도 이어져 2023년 9월 현재 기금 적립금이 1천억 원대로 줄어든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후 정부와 예술위가 함께 노력해 2010년 경륜∙경정수익 배분금, 2015년 국고(일반회계), 2016년 관광진흥개발기금∙국민체육진흥기금 등이 각각 전입되기 시작하면서 재원 사정이 다소 호전되기는 했다.
앞서 영화발전기금 모금방식을 간략히 언급했지만, 영화발전기금은 2007년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신설된 기금이다. 가장 중요한 조성 재원은 영화상영관 입장권에 대한 부과금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2003년 말 폐지된 문예진흥기금 모금과 징수율만 다를 뿐 동일한 징수방식의 재원이다. 영화발전기금이 신설된 때인 2007년 문예진흥기금의 재원 사정은 적립금을 인출해 예산을 편성할 정도로 정말 암담한 상황이었다. 2004년부터 모금 폐지 대체재원으로 복권기금이 전입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전입금은 소외계층을 위한 사업으로 그 용도가 제한돼 있었고, 불용액이 발생하면 기금에 적립하는 게 아니라 복권위원회에 반납해야 했다. 2003년 폐지될 때까지 문예진흥기금 모금액 중 영화관이 절대 비중을 차지했으므로 문예진흥원은 매년 모금액 중 50~60억 원가량을 세출예산으로 편성해 영화진흥위원회에 지원금으로 지급했다. 더군다나 2007년 영화발전기금을 신설하면서 2003년 부담금관리기본법에 의해 폐지된 문예진흥기금의 영화관 모금방식과 동일한 징수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문예진흥기금의 영화관 모금은 국민에게 부담을 주고, 영화발전기금의 영화관 모금은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부과금으로 탈바꿈한 것인가? 더욱이 부담금관리기본법에 규정된 부담금 설치가 가능한 기금 목록을 살펴보면 2003년 문예진흥기금 부과금에서 2007년 영화발전기금 부과금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이다. 모금 제도 폐지 때문에 2004년부터 재원 사정이 극히 열악해진 문예진흥기금 입장에서 몹시 억울한 일이다. 위에 열거한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2007년 영화발전기금 신설 시 예술위가 일정 금액을 영화발전기금이 문예진흥기금에 지원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와 명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통합문화이용권(문화누리카드) 이용 가능 분야에 영화관을 포함해 매년 100억 원 넘는 문예진흥기금이 영화산업에 지원되고 있는 지금, 더없이 아쉬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7. 독립성과 자율성 확보를 위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출범(2005. 8. 26)
문예진흥원의 위원회 전환에 대한 논의는 제15대 정부(김대중 정권) 때부터 논의됐다. IMF 외환위기를 이후 사회 전반에 구조개혁 광풍이 불어 닥치며 문화정책의 구현에 있어 민간자율성 확대 주장이 있었고 문예진흥원과 영화진흥공사를 민∙관이 참여하는 행정위원회로 운영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특히 IMF 관리체제 극복이 최대 과제였기에 기초예술보다 문화산업 분야에 관심이 고조되면서 영화진흥공사의 영화진흥위원회로 전환은 바로 실현됐지만, 문예진흥원은 공공기금 통합과 모금제도 폐지라는 위기 상황 때문에 위원회 전환 논의가 중단됐다.
위원회 체제로의 전환(2005.8.30 세계일보)

위원회 체제로의 전환(2005.8.30 세계일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40년사

2002년 12월 대선에서 당선된 제16대 정부(노무현 정권) 문화 분야 선거 공약은 청와대를 문화의 상징으로, 문화예산 확충 및 문화향수권 제고, 문화예술의 자율성 및 다양성 확대, 지방문화 육성과 문화분권화 시대 정착, 문화기반시설의 지속적 확충 등을 포함해 총 25가지였다. 그중 문화예술의 자율성 및 다양성 확대의 세부항목인 ‘순수문화예술진흥기구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현장 문화예술인 중심의 지원기구로 전환’이 예술위 설립 추진의 배경이다. 당시 초대 문화관광부 장관이었던 이창동 장관은 문화행정혁신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내부에 민간자율 추진 TF를 설치(2003. 4. 14)했다. 이 TF에서는 위원회 전환을 위해 문화관광부와 예술위의 올바른 위상과 관계를 연구하고, 문예진흥법 개정안을 준비했다. 문화관광부와 예술위와의 역할 조정 방향은 이듬해 발간된 새 예술정책 『예술의 힘』(2004. 6. 문화관광부)에 잘 드러나 있다.
민간자율 추진 TF는 석 달여의 논의 끝에 위원회로의 전환을 골자로 하는 문예진흥법 개정안 초안을 마련하고 이후 문예진흥법 개정안에 대한 공청회 개최, 개정안 입법예고 및 문화예술계의 의견을 수렴했다. 우여곡절 끝에 의견을 모은 문예진흥법 개정안은 국회에 제출돼 2004년 3월 문화관광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원회를 통과했으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로 정국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5월 29일 제16대 국회가 폐회되면서 문예진흥법 개정안도 자동 폐기됐다. 그러나 문화관광부는 2004년 4월 문예진흥법 개정안을 제17대 국회 재입법 추진할 것을 결정하고 법안의 내용도 제16대 국회 상정 법안과 동일하도록 했다.
2004년 6월 3일 제17대 국회에 제출된 문예진흥법 개정안은 9월 13일 문화관광위원회에 상정됐고 12월 7일 문화관광위원회 의결을 거쳐 12월 29일 본회의에서 의결됨으로써 최종적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2005년 1월 14일 문예진흥법 개정안이 정부로 이송됐으며 같은 달 18일 국무회의 의결을 마친 뒤, 1월 27일 마침내 공포됐다. 이후 문예진흥법 시행령 일부 개정이 진행돼 입법예고가 있었고 6월 7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친 뒤, 6월 13일 시행령이 공포됨에 따라 예술위 출범을 위한 법적 장치는 모두 완비됐다. 한편 문예진흥원에서는 위원회 전환 준비를 위해 이미 2005년 2월 초부터 내외부 인사 14인으로 구성된 예술위 설립준비단(TF)을 구성∙운영하고 있었다. 준비단은 위원회 설립 및 운영에 필요한 제반사항, 즉 위원추천위원회 구성, 소위원회 구성∙운영, 정관 및 규정, 사무처 조직∙운영, 문예진흥기금사업 평가제도, 지원시설 운영 등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문화관광부는 위원회 출범을 위해 2005년 6월 27일 21명의 위원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6월 29일부터 7월 13일까지 위원 후보자 공개 모집을 진행했다. 새로운 예술 지원기구의 탄생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 총 199명에 이르는 많은 후보자가 응모했다. 위원추천위원회는 7월 22일 최종 선임위원 11명의 2배수인 22명을 후보자로 압축해 장관에게 추천했고, 후보자 검증을 거쳐 8월 10일 최종 경정해 문학평론가 김병익 등 11명이 위원회 설립위원 및 임기 3년의 1기 위원이 위촉됐다. 2003년 4월 문화관광부 내에 민간자율 추진 TF가 설치돼 본격적으로 위원회 전환 준비가 시작된 이래 2년 4개월여만인 8월 26일 위원 11명으로 구성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출범했으며, 8월 29일 초대 위원 및 위원장(김병익) 취임식, 9월 29일 공식 출범식이 거행됐다.
상임원장 독임제였던 문예진흥원을 합의제 기구인 위원회로 전환한 가장 주요 배경 중 하나는 현장 예술계의 수요를 재빠르게 반영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위원회 출범과 더불어 사업체계 개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문화에술 진흥의 목표 체계를 수정해 달라진 문화예술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기금 지원사업의 효과가 예술영역에 머물지 않도록 지원사업 체계의 개편을 통해 예술의 가치를 확산하고 사회적 기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문예진흥기금 정책의 비전과 목표를 재설계한 ‘아르코비전 2010’의 수립이다. ‘아르코비전 2010’은 예술위의 임무를 “훌륭한 예술은 우리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모든 이가 창조의 기쁨을 공유하고 가치 있는 삶을 누리게 함”으로 규정했다. 또한 비전으로 “예술을 통한 창의적 사회, 성숙한 사회, 열린 사회 구현”을 제시했다. 즉 예술활동이 활기차게 이뤄지고, 예술 작품이 삶을 풍요롭게 하며, 예술적 가치가 다양하게 피어나는 사회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아르코비전 2010’은 2006년 4월 5일 비전 선포식을 개최해 대내외에 알렸고, 선포된 비전체계는 예술위 사업 부문과 경영 부문에 전략목표와 핵심과제 등으로 녹여 예술위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5년 1월 문예진흥법을 개정하면서 독임제였던 문예진흥원을 합의제 기구인 위원회로 전환한 취지는 위에서 언급한 현장 예술계의 수요를 재빠르게 반영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기 위함과 동시에 정부가 임명하는 원장과 행정관료 직원들이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웠던 문화예술정책과 집행에서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독립성과 자율성이 확립돼야만 각종 공론화 과정을 통해 앞서가는 예술정책의 비전을 제시하고 예술의 역할이나 가치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으며, 예술인에 대한 옹호 기관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위 출범 이후 이러한 임무와 역할을 잘 해내고 있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을 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8. 미흡했던 정책 효과
자료관∙예술극장 분리 독립 및 재통합(2010~2014)
예술극장 구조조정 논의는 이미 제15대 정부(김대중 정권)부터 등장했다. 당시 외환위기에 따른 IMF 관리체제 하에서 ‘정부기관의 효율성 강화’라는 행정방침에 따라 문화관광부 산하기관들도 인원 감축 등 구조조정과 민영화 등의 논의가 진행됐다. 당시 기획예산위원회(현 기획재정부)가 마련한 문예진흥원 구조조정안에는 ‘문예진흥기금 모금 중단’, ‘문예진흥기금의 공공기금화’, ‘문예회관과 미술관의 민간위탁’, ‘조직 및 인력감축’ 등의 내용이 들어있어 조직 전반에 상당한 위기감이 드리워졌다. 이중 모금 중단(2003)과 조직∙인력 감축(1998, 정원 35% 감축) 등 두 가지 과제는 실제로 이행됐다.
문예진흥 기반시설에 대한 구조조정 문제는 제17대 정부(이명박 정권)에 다시 등장하는데 제17대 정부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정부와 산하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우선 문체부 조직을 이전 제16대 정부(노무현 정권)의 팀제에서 과(課) 편제로 원상회복하는 한편 2009년에는 대국대과제(大局大課制)를 적용해 본부에 10개 과를 축소했다. 기존 문화정책국과 예술국은 2009년 4월 문화예술국으로 통합돼 하부에 문화정책관과 예술정책관을 두었다. 아울러 제16대 정부는 문체부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돼 온 문화정책 영역을 ‘선진화’라는 기조 아래 여러 조직으로 분리∙분산돼 있던 기관을 효율성 원칙에 따라 통합하고, 기능이 중복∙혼선되는 영역에 대해서는 조정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2009년 5월 문화콘텐츠진흥원,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한국게임산업진흥원, 문화콘텐츠센터,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디지털콘텐츠사업단 등 5개 기관이 한국콘텐츠진흥원으로, 2009년 7월 저작권위원회와 컴퓨터프로그램보호위원회가 한국저작권위원회로 통합됐다.
반면 문화산업 분야와는 달리 기초예술 분야에서는 오히려 통합이 아닌 분리 정책이 추진됐는데 예술위에서 운영하던 예술정보관과 아르코예술극장이 2010년 (재)국립예술자료원과 (재)한국공연예술센터로 각각 분리됐다. 당시 세계를 휩쓸던 신자유주의 영향을 받은 제17대 정부는 당시 국립 및 공공기관에 대한 법인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이를 공공기관을 민영화하는 또 다른 방편으로 활용했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는 국립극단(2010), 국립현대무용단(2010), 한국공연예술센터(2010), 국립예술자료원(2010) 등이 대표적이며 문체부 소속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도 법인화를 추진했으나 문화예술계의 반대에 부딪혀 성사되지 못했다. 그런데 2010년 예술위에서 분리∙독립될 당시 펼쳐진 원대한 미래 청사진과는 달리 한국공연예술센터와 국립예술자료원은 불과 4년만인 2014년에 다시 예술위에 재통합됐다. 어떤 정책이든 정책 집행과정에서 항상 순기능과 역기능이 동시에 나타나기 마련이며, 어떤 정책이든 장점만 갖고 있거나 단점만을 가진 정책은 없다. 문체부의 자료관∙예술극장 분리 독립 정책도 긍정적인 부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두 문화시설이 예술위의 여러 부서 중 한 부서로 편제돼 운영됐을 때, 성장과 발전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분리∙독립을 통해 자체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보다 전문적인 시각으로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우수인력을 양성하며, 역량을 높였다면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분리∙독립 정책은 문체부 스스로 ‘정책 효과가 미흡했다’라고 인정할 만큼 단점과 한계가 두드러졌다.
두 기관은 2014년 재통합하면서 공식 문건을 통해 분리∙독립의 문제점을 밝혔다. 공연예술센터는 예술가 및 단체에 대한 지원체계가 분리돼 운영됨에 따라 예술단체 등에 대한 체계적 육성이 곤란한 점을, 예술자료원은 예술위가 보유한 예술자료와 네트워크 활용이 불가능해 자료수집 기능이 정체되고 있는 점을 언급했다. 두 시설의 분리∙독립과 재통합 과정에서 발생한 인력통합 문제, 기획∙인사∙총무 등 중복인력의 처리 문제, 재산의 귀속과 예산의 통합, 조직개편 등 후속 조치에 따라 행정력 낭비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때 그 당시 그 사회가 처한 상황과 문제점을 정확하고 면밀하게 분석해 시행 가능한 여러 가지 대안 중 ‘가장 효과적인 정책’을 선택해야 한다. 그 정책 시행을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순기능과 역기능 중 순기능이 월등히 높은 정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 정책 수립과 집행 등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자질, 그리고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9. 해결해야 할 소통이라는 숙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전(2014. 4)
정부는 수도권의 인구 집중을 억제하기 위한 긴 시간 각종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국토 면적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에 인구의 47.2%, 100대 기업 본사의 91%가 집중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정부의 강력한 억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인구 유입 효과가 큰 공공기관 중 85%가 수도권에 집중돼 지방의 인구 감소 문제와 인재 유출이 심화하는 등 국가 전체의 경쟁력이 저하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제16대 정부(노무현 정권)는 수도권 집중의 근원적 해소와 자립형 지방화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 제16대 정부는 2005년 6월 24일 ‘공공기관 지방이전계획’을 발표하고 총 153개 공공기관을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과 충청권 지역을 제외한 10개 혁신도시에 분산∙ 배치한다. 예술위는 한국전력, 한국콘텐츠진흥원 등 16개 공공기관과 함께 전라남도 나주혁신도시로 이전이 확정됐다. 2005년 4월 혁신도시 도시 입지 선정을 완료하고 그해 9월부터 혁신도시별 부지조성 공사에 착공했으며, 2012년부터 공공기관 이전이 개시됐다. 2014년 4월 극장, 미술관, 자료관, 인력개발원 등 문예진흥 기반시설을 제외한 예술위 전 부서가 나주혁신도시로 이전한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은 과거 박정희 정권 때부터 정부산하 연구기관과 청(廳) 단위 국가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법적∙제도적 근거 없이 수도권 집중완화라는 소극적인 목적을 위해 간헐적으로 추진됐다. 이와 달리 제16대 정부는 국가균형발전특별법에 법적 근거를 두고 추진됐다는 점에서 과거의 이전 정책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나주혁신도시 신청사 개청식

나주혁신도시 신청사 개청식 ⓒ문화체육관광부

전국 10개 혁신도시에 총 153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한 1차 지방 이전이 마무리된 이 시점에서 예술위의 나주혁신도시 이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국가적 차원에서는 예술위의 이전은 수도권 일극 중심에서 다극분산형 국토 공간 구조로의 개편에 기여했다. 또한 직원과 직원 가족들이 나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가며 수도권 인구 분산과 지역경제 활성화, 지역의 교육∙문화 질적 향상에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그렇다면 과연 기관 차원에서는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 개별 기관마다 처한 상황과 환경이 다르지만,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더 큰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로는 지방 이전에 따른 구성원들의 이직 현상, 지방 근무 기피 현상, 잦은 서울 출장에 따른 업무 비효율, 지방 근무 기피에 따른 신입직원 유치 어려움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문제보다 더 심각하고 향후 기관의 위상이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이 있다. 바로 지방 이전으로 인해 창작예술인들과 예술행정 직원 간의 교류와 소통 채널이 단절되거나 급격히 줄어든 문제다. 또한 정책과 자원이 투입되고 있는 예술 현장과 가까이 있지 못하고 유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원정책과 각종 프로그램을 시의적절하며 효과성 높게 수립∙입안하는데 있어 예술 현장과 동떨어져 있으면 한계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현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탁상공론 정책이나 프로그램을 양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예술계로부터 이런 지적은 서울에 있었을 때도 제기된 문제인데 나주에 있는 지금은 어떨까 생각해보면 결론은 자명해진다.
창작예술인의 60% 이상이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다.(예술활동증명 발급자 중 64%가 수도권 거주) 또한 매년 연간 문화예술 활동 건수 50% 이상이 수도권에서 열린다. 수도권에 거주하지 않는 지역예술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예술위는 분명 수도권을 대상으로 한 지역 차원의 지원기관이 아니라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중앙 지원기관이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했을 때 지역적 분포가 어떤가? 매년 기금을 통해 지원하는 예술인이나 단체, 행사 개최 장소 등은 수도권이 높은 점유율을 나타낸다. 이런 수도권 점유 추세는 지역예술인들의 예술적 수월성이나 역량이 획기적으로 높아지지 않는 한 짧은 기간 내에 유의미한 큰 변화를 만들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예술인들과의 소통, 교류가 적고 예술 현장과 멀어진 예술행정가에게 좋은 예술정책이나 예술 행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주 이전에 따른 구성원들의 거주 안정 및 복지제도 등도 잘 마련해야 하지만, 예술위는 위에 지적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시급히 마련하고 명확한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간 소통과 교류가 줄어들고 남는 것은 오직 무관심뿐이다.
10.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2014~2016)
제17대 정부(박근혜 정권) 시절 발생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에 관한 많은 글들이 발표됐으나 공식적이고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이하 백서)와 사법부를 대표하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판결문』(이하 판결문)이다. 우선 백서는 2017년 7월 31일부터 2018년 6월 27일까지 문체부 내에 블랙리스트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해 구성된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 활동을 종결하며 총 10권 분량의 책자로 발간한 조사보고서이다. 백서에서는 블랙리스트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집권세력이 국가기관, 공공기관 등을 통해 법∙제도∙정책∙프로그램∙행정 등의 공적 또는 강요∙회유 등의 비공식적 수단을 동원하여,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정치적 견해가 다른 문화예술인들을 사찰∙감시∙검열∙배제∙차별하는 등 권력을 오∙남용함으로써 민주주의 원리를 파괴하고, 예술 표현의 자유와 문화예술인의 권리를 침해한 국가범죄이자 위헌적이고 위법, 부당한 행위이다.3
백서는 이러한 정의에 근거해 ①입헌 민주주의의 침해 ②민주주의 기본 질서 부정 ③법치국가 원리의 침해 ④평등원칙의 침해 및 사회적 불평등 확대 ⑤문화국가 및 사회국가의 원리 침해 ⑥문화정책의 공공성 및 투명성 훼손 ⑦행정절차 및 행정법 관련 불법∙부당 행위의 일상화 ⑧이념과 이권에 기반한 통치계획의 수립 및 추진 ⑨정책을 가장한 국가범죄로 규정했다.4 한마디로 ‘국가범죄’로 정의 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범죄로 규정한 블랙리스트 사태의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백서는 ①문화국가 원리를 구현할 법제도 장치 미비 ②국가 주도 문화정책 수립의 한계와 폐해 ③문화정책 전달 체계의 위계화 ④문화정책을 둘러싼 불안정하고도 퇴행한 협치 구조 ⑤문화행정의 민주적 운영을 위한 공론장, 사회적 통제장치 미비 등 5가지를 꼽았다.5 블랙리스트는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각종 사건에 대한 성명서 또는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선언 등에 이름을 올리거나 창작 활동에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관련 문화예술인에 대해 정부 기관이 작성한 명단이다. 정부 기관을 비롯해 공공기관은 블랙리스트를 기초로 각종 문화예술 사업이나 공연 등 창작 행위에 있어서 해당 문화예술인에게 다양한 인권 침해적 불이익을 가했다. 해당 문화예술인들의 표현 행위는 어떤 위험을 초래한 것도 아니었고, 감시당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 인권에 근거한 예술적∙정치적∙사회적 표현 행위였다.6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당시 정부는 블랙리스트 속 문화예술인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차별했다. 그 목적은 문화예술계를 권력에 순응하게 함으로써 국민들의 비판 의식을 억압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문화예술인을 다양하게 차별한 사건들이 있었다. 블랙리스트는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 행위를 침해하고 관련 문화예술인의 예술 활동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체주의 파시즘 국가로 전복하려는 범죄였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지배 세력이 공권력을 오∙남용하여 문화예술계 영역에서 위헌적 범죄를 저지른 다양한 사건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더욱이 특정 문화예술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 다양한 문화예술을 누릴 국민의 기본권까지 침해했기 때문에 문화예술계에 한정된 사안이 아니다. 2016~2017년에 걸친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이게 나라냐”라고 외쳤듯 한국의 국가 체제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다.7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지만 블랙리스트 사태가 시작된 당시 상황을 복기해보자. 예술위에서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이상 징후를 발견하기 시작한 시기는 2015년도 지원사업 정기공모를 준비하던 2014년 7월경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15년도 문예진흥기금운용계획안에 대한 주무 부처 협의가 끝나 기획재정부로 제출된 이후, 문체부 예술정책과로부터 문예진흥기금 지원심의 규정과 추진 일정 등과 관련한 자료 요청을 많이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문체부에서 2015년도 문예진흥기금 지원심의의 진행과 관련한 사전 검토가 이뤄진 것으로 추측된다. 2014년 9월 문체부 청사에서 당시 예술정책관이 주재하는 회의가 개최됐다. 이 회의는 연중 수시로 열리는 업무협의 회의가 아닌 예술 지원사업에 대한 정부의 정책 방향과 방침을 알려주고 정확한 이행을 지시한 회의로서 예술위 입장에서는 블랙리스트 사태가 현실화되기 시작한 첫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회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문체부 주요 전달사항

· 2015년도 정기공모 진행 시 사회적 논란을 가져올 예술가나 단체에 대한 지원을 제한하는 조치가 불가피한 상황
· 이러한 조치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사업 수행에 큰 어려움이 예상되는 상황
· 지원제한 조치가 가능한 상황(지원심의 제도 등 구조와 진행방식)인지 여부를 점검해 심의 진행에 대비할 필요가 있음

▸ 예술위 참석자 입장 및 답변 주요 내용

· 사회적 논란이 예상된다는 이유로 지원심의에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며, 가능하지도 않음
· 지원사업의 심의는 오로지 예술가 등 외부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의 권한이며, 심의에 개입할 명분과 방법이 없음

▸ 예술위 답변에 대한 문체부 추가 요구사항

· 2015년도 정기공모 지원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정부의 지시를 반영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
· 2015년도 정기공모 지원사업의 진행단계마다 문체부와 협의해야 함
· 심의 진행 전 일정, 지원신청 내역, 심의위원 구성 등의 내용을 문체부와 공유하고, 정부의 의견을 반영해야 함
· 심의 진행 후 결과를 문체부에 통보하고, 승인을 받은 후에만 발표 및 지원이 가능함
이후 2015년 정기공모 사업이 본격 진행된 2014년 12월경부터 문체부로부터 지원심의 외압(지원배제 대상자의 지원 제외)이 시작됐다. 당시 예술위가 정부의 외압에 대한 대응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①부당성, 실행 불가능 및 곤란 상황 전달 및 건의 ②지원배제 요구 예술가 및 단체에 대한 적용 최소화 건의 ③지원배제 요구 예술가 및 단체에 대한 우회 지원 ④정부에서 절대로 양해하지 않은 지원배제 요구의 이행 등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실제 ②내지 ③의 방법을 통해 일부 사업의 경우 피해를 입지 않고 지원된 사례도 있었다. 이후 박근혜 정부의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 과정에서 특별 검사를 통해 지원사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배제 지시 배경과 관련자를 비롯해 감사원도 관련 조사를 진행했다. 두 조사를 통해 예술위도 정부의 지원배제 명단과 시행의 전모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었다.
2016년 10월, 블랙리스트 사태가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블랙리스트 사태는 정부가 문화예술계를 통제해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심각한 사건으로 규정됐다. 이 과정에서 예술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문화예술 진흥을 담당하는 기관인 예술위의 블랙리스트 사태 개입 사실이 드러나며 책임 규명을 위해 기관장 사퇴, 관련 책임자들에 대한 징계 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2017년 2월 23일 예술위는 ‘문예진흥기금원사업 추진과정 중 발생한 지원배제 사태와 관련한 사과문’을 예술계와 국민에게 발표하면서 깊은 자성의 자세로 재발 방지와 제도 개선 노력을 약속했으며, 정부의 부당한 외압으로부터 독립성을 지켜내지 못한 데 대해 깊은 반성과 각성을 다짐하고 확인했다. 이후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위원장과 사무처장이 중도 사퇴했다. 한편 2017년 5월 제19대 정부(문재인 정권)가 출범하면서 그해 7월 문체부 내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가 구성됐다. 이후 약 10개월 동안 문화예술 진흥기관으로서 블랙리스트 실행에 대한 깊은 반성과 이런 과오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모든 임직원이 동 조사위원회의 조사를 어느 기관보다 성실히 이행했다. 진상조사위 징계권고안에 따라 관련자에 대한 징계 양정을 위한 인사위원회 구성 및 징계를 시행8 하고 이후 기타 공공기관으로 전환, 문체부와의 자율운영공동선언 추진, 문예진흥법 개정을 통해 호선제를 부활하고 8기 위원장을 호선으로 선출하는 등 정부 및 예술위 차원의 각종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 및 시행했다. 2021년 10월에는 블랙리스트 관련 중장기 의제 점검, 신규 의제 도출 및 실천을 위한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와 회복을 위한 TF’ 구성해 2022년 12월 말까지 운영했다.
지금까지 당시 블랙리스트 관련 정부 외압에 대한 대응과 사과문 발표, 진상조사위 조사에 대한 성실한 수감, 관련 직원 징계, 이후 내부 재발 방지 활동 등에 대해 기술한 이유를 ‘예술위가 나름대로 정부 외압에 대응하고 사과하고 조사받고 관련자 징계를 내렸으니, 면죄부를 달라고 하는 거 아니냐’라는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예술위는 문화예술을 진흥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엄숙한 임무를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국정원, 문체부 등 권력기관의 지시와 명령을 받아 정권에 비판적인 우수한 예술단체와 예술인들을 지원에서 배제하는 큰 피해를 줌으로써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하여 예술위 구성원 모두가 가져야 할 확고한 입장은 2017년 2월 23일 예술계와 국민에게 발표한 사과문의 내용에서 한 치도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2005년 예술위의 출범은 지원정책의 대상이었던 현장 문화예술인들이 스스로 지원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고, 예술지원 정책에 있어서 자율성과 독립성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술위는 이러한 사명을 망각하였고 부당한 지시를 양심에 따라 거부하지 못하였으며 반헌법적 국가범죄의 부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현장 예술인 여러분과 국민 여러분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드렸습니다.”

예술위의 블랙리스트 사태 사과문 중(2017. 2. 23)

아울러 반문화적, 반민주적인 블랙리스트 사태가 국가 차원에서 또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공직자로서의 반성과 각오를 넘어 문화예술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에 예술행정가로서의 신념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2020년 1월 30일 대법원 판례(직권남용 권리행사 등)는 이에 대한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예술을 매개로 정신적 영감과 만족을 얻기도 하고 혹은 자신과 다른 처지에 놓인 타인과 그들로 구성된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고 존중하며 대화하게 된다. 이렇듯 문화예술은 개인의 자유로운 인격 발현에 도움을 주고 사회에는 집단적 정체성, 발전과 통합의 기초를 제공한다. 오늘날 대부분 국가에서 문화예술의 진흥과 보호, 육성을 위해 보조금의 지원 등 여러 가지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문화예술의 이러한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주목한 결과이고, 다른 한편 이처럼 공공재의 성격을 갖게 된 문화예술의 공급을 오로지 자유시장의 영역에 맡길 경우 개별성∙고유성∙다양성을 본질로 하는 문화예술의 공급이 사회적 수요에 대응할 수 없게 되는 사정을 진지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예술가와 그의 예술 활동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자칫 문화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국가는 지원 대상인 예술의 내용이나 방향에 개입하는 방식을 통해 구성원의 정신적 일상을 일정 정도 지배하거나 유도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영국예술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케인즈는 이러한 우려에 대한 대응으로 ‘지원은 하되 예술의 내용에 대한 간섭은 있을 수 없다’는 취지의 이른바 ‘팔길이 원칙’을 제시했다. 위 원칙은 말 그대로 국가나 행정기관이 예술 창작과 관련하여 예술가를 지원할 때 팔길이만큼 거리를 둔다는 의미인데, 예술지원의 원칙이기도 하지만 독립적으로 구성된 예술지원기관이 관료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운영되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이기도 하다. 위 원칙은 현재 예술지원의 보편적 철칙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화예술 그리고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갖는 위와 같은 사회적 의미나 기능, 그 영향 등을 고려하면서 문화국가의 원리를 천명한 우리 헌법 제9조 모든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제21조에 더해 특별히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고 예술가의 권리를 보호하는 제22조의 규정 취지를 종합하여 이해하면, 공직자가 문화에 대한 지원자로서 국가의 헌법적 과제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때는 앞서 언급한 헌법 제7조의 실천적 함의(공무원의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지위 및 정치적 중립성 규범)를 더욱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 정당 등의 부분 이익이나 특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국민 전체의 출연(세금)을 기반으로 문화예술에 접근할 국민 전체의 기회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조건 없는 재정적 지원’, ‘정치 지도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지원’, ‘경제적 지원에만 머물고 창작행위와 내용에 간섭하지 않는 지원’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의 부당한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9

블랙리스트 사태는 1973년 기관 설립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에 봉착했던 사건이자, 예술위 역사에 가장 큰 치욕과 오명을 안겨준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예술위가 이 같은 불행한 사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백서에서 블랙리스트 사태의 원인으로 지적했던 ‘문화행정의 민주적 운영을 위한 공론장 마련 미비’를 해결해야 한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예술위에서 가장 치명적이고도 뼈아팠던 것은 이 사태에 대한 실체 파악이나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한 내부 공론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이 문제를 공식적인 의제(agenda)로 올려 논의한 적도, 예술위 전체 의견이 집약된 건의서, 의견서, 성명서도 전혀 없었다.
2005년 독임제 기구였던 문예진흥원을 합의제 기구인 위원회로 전환한 취지는 현장 예술계의 수요를 재빠르게 반영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고 정부가 임명하는 원장과 행정관료인 직원들이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웠던 문화예술정책과 집행에서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전환 취지를 깊이 생각했다면 블랙리스트 사태 당시 예술위의 침묵과 순응은 2005년 위원회 전환 취지와 정신에 대한 명백한 배반이다. 오랜 기간 예술계 모두의 염원을 담아 2005년 합의제 기구로 전환한 예술위인 만큼 앞으로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항상 열띤 토론이 이뤄지는 그런 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1. 문예진흥원의 창작극 지원을 받은 9개 극단의 지방 순회 공연 내용을 다룬 기사로, 몇 지역은 ‘사상 처음으로 연극이라는 것이 공연된 곳’이었으며 ‘축제 분위기’를 형성했다는 내용이 있다.
  2. 1978년 5월 19일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신축부지에서 거행된 종합문예회관(현 아르코미술관, 아르코예술극장) 기공식. 왼쪽부터 김수근 동 회관 설계자, 이봉래 예총회장, 곽종원 문예진흥원장, 김성진 문화공보부장관
  3.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1(2019). p.20 참고
  4.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3(2019). p.45-52 참고
  5.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3(2019). p.52-54 참고
  6.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3(2019). p.52-54 참고
  7.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1(2019). p.21 참고
  8. 정직 4명, 감봉 3명, 견책 4명, 엄중주의 5명
  9. 대법원 판결 2018도 2236, 2020 p.63~64
양경학
양경학(숙명여자대학교 객원교수)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학부에서는 영문학, 대학원에서는 공공정책을 전공했다. 198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입사해 2019년 퇴직하기까지 32년간 예술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퇴직 후에는 대학 출강과 예술기관 종사자 교육 등을 통해 청년들의 문화예술 역량 개발에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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